아이는 셋을 낳고 싶었다. 임신과 출산까지는 체질이라고 생각했고, 남편에게는 징징거리지만 육아는 외국에서 가족들 도움 없이 누구보다 씩씩하게 잘 했다고 믿는다. 셋째까지는 거뜬하게 낳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남편이라는 산에 부딪쳤다. ‘다섯이면 기차는 어떻게 타지? 우리 차부터 바꿔야 하고, 나이 차이가 나서 애들이 같이 놀지도 못할 거야. 이제 조금 편해져서 여기저기 다닐 수 있는데, 아기가 생긴다면 우리는 각자 따로 행동해야 하겠지. 또 비행기 표 값도 비싸져. 네가 딸을 갖고 싶다고 하는데, 그게 어떤 성별이든 상관없이 낳자고 하면 생각해 보겠어.’
남편 말이 구구절절이 맞다. 벌써 2년 전에 이런 고민을 했고, 지금은 이 생각을 접었다. 간혹, 남편 닮은 여자애 있으면 좋겠다, 머리도 묶어 주고, 핑크색 원피스도 입혀 주면 얼마나 예쁠까 하고, 또 딸과 이것저것 조잘조잘 이야기 하는 상상을 했다.
성별 상관없이 셋째를 낳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는 취직을 하려고 했지만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감이 없었다. 셋째를 낳고 키우는 동안 나를 잊으면 되겠다는 도피식으로 출산을 하려는 자신을 발견하고, 셋째 낳기를 단념했다. 적극적으로 취직을 시도했고, 지금은 글을 쓰고 있다. 글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거라는 기대는 안 하지만, 글쓰기로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딸자식이 내게 무엇을 해줄까?
내가 딸아이에게 해주려던 것들은 대리만족이었다. 입히고 싶은 대로 입히고, 가르치고 싶은 것을 강요하는 것도 아이들이 세 살 정도만 되면 그만둬야 한다고 느꼈다. 아이는 엄마의 인형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이는 독립적인 존재인데, 자신의 욕구를 대신 만족하는 도구로 생각하는 것은 애초에 잘못이다. 내가 엄마에게 받지 못한 예쁨을 딸에게 전해주고, ‘여성성’을 드러내게 하고 싶었다. 사실 ‘여성성’이 부족한 건은 자신이지, 딸아이가 아니다. 게다가 이런 여성성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도 있고, 지금은 내가 자랄 때 ‘여성성’이라고 하는 것이 여성에게 족쇄나 다름없다.
원피스를 입히고 머리를 길게 기르고, 예쁘게 화장하기로 여성성을 표현하는 것은 이제 과거일 뿐이다. 치마를 입는 것만이 여성성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여자라는 동물로 아름다울 수 있는 역할은 벌써 다했다. 임신과 출산을 했고 모유 수유를 견뎌냈다. 출산으로 불었던 몸을 제 자리로 돌려놓는 힘겨운 과정도 지났다. 그것으로 내 여성성은 증명되었고, 완성시켰다. 나는 남성 위주 사회가 짊어준 ‘여성성’에 순순히 따랐다. 그 여성성을 내 딸아이에게 다시 굴레를 씌워주려고 한 것도 잘못이다.
그래서 더 이상 딸을 낳고 싶다고 엉뚱한 욕구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여성성에 대한 집착보다는 인간성, 인격에 집중해야 할 때가 아닐까. 자신이 여성성이 부족하다고 생각한 것은 성급하고, 단도직입적이며, 직설적이라는 성격적 부족함에서 시작했다. 그런 것들을 보충하고 싶다면, 침착하고, 부드러운 말투를 가지며, 자상한 태도를 기르면 된다.
글쓰기를 하면 문제를 제시하고 해결점이나 답을 제시하는 패턴으로 글을 쓰게 된다. 자신을 이해하고,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듯, 자신을 파헤치고 그것을 옳은 방향으로 길을 돌리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것은 또 성장이라는 이름을 대변했다. 하지만,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한 적이 있던가. 조급하고 직설적인 자신을 한 번도 제대로 본 적이 있는가? '자기이해'라는 잣대로 파내고, 다시 덮고 다시 파내고 하는 동안, 나는 제대로 나다운 적이 없었다. 딸이 없다는 것은 결핍이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서 지금 나를 바꾸고 희생을 하기를 강요하려고 했다.
여성성이라는 성격적 결함을 메꾸기 위해서 지금의 나는 부족한 존재일 뿐이다. 아니다. 나는 딸이 없어도 아들이 있고, 침착하지는 않지만, 예민하게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아차릴 때도 많다. 내게 여성성은 내 자체로서 충분하다. 미래에 존재하는 완벽한 내가 아니라 지금 내 앞에 존재를 인정하고 바라봐 준다. 그래서 나는 딸을 낳지 않을 것이며, 여성성을 위해 치마도 입지 않을 것이다. 나, 자신이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