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년시절회고에세이
억지로 학과 모임에 참여해 애초에 관심 없는 선배에게 시시콜콜한 질문을 하고 듣고, 맛없는 술을 마시는 게 부질없다고 생각해서, 학과 생활도 안 하고 아웃사이더로 남았다. 그런 자신이 독일에서 취직을 하고 싶은 것이 아이러니했다. 동료가 있고, 월급도 있고, 또 소속이 생긴다. 그 단체를 위해서 기여한다는 점도 끌린다. 내 잘못 하나로 회사에 타격을 주기도 하고, 성공을 이끌기도 한다. 그런 짜릿한 경험에 대한 로망이 있었나 보다. 소속감에 대한 갈망이었을까. 가만히 들여다보면 소속원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인정받기는 다른 말로 하면 칭찬이다. 그것에 대한 갈망이었다.
자라면서 칭찬을 많이 받지 못했다. 예쁘지 않다고, 모개(모과의 사투리)라고, 메주라고, 못난이라고 하는 어른들, 또 빼빼로라고 사자라고 놀리는 친구들만 있었다. 예쁘다고 귀엽다고 해 주는 어른은 부재했다. 국민학교 입학식, 학급에서 자기소개를 하던 때가 떠오른다. 엄마는 교실 창밖 복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이름을 말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선동이가 그다음이다. 또랑또랑하게 소개를 한 그 애는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알고 보니 선동이는 종로 애들 사이에서 선망 대상이었다. 똘똘하게 생겼고, 예의도 바르고 말도 잘했고 실제로 똑똑했다. 칭찬의 빈익빈 부익부를 느꼈다. 나는 상대적으로 초라해졌다.
공부를 잘하면 칭찬을 받을까. 반장이 되면 엄마의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 4학년 때 공부를 열심히 해서, 기적적으로 성적이 올랐다. 반장을 하자. 그때부터 중학교 3년 동안 반장을 도맡았고 학생회장도 됐다.
엄마는 무뚝뚝했다. 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었지만, 엄마는 농사일과 시집살이, 종교활동에 바빴다. 지금도 여전하다. 이해할 수 있지만 따뜻한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엄마 무관심 그늘에서 나는 독해지고, 성공을 위해서 빡세게 달렸다.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고 위로를 해줬으면, 나를 제대로 바라봐 주고 칭찬했다면 내 인생은 어땠을까. 에두르지 않고, ‘딸, 엄마는 딸이 자랑스러워.” 한마디 들었다면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을 거다. 내 인생은 핑크빛으로 가득 찼겠지.
유치원 때 엄마는 내게 파마를 시켰다. 머리카락이 다른 애들에 비해서 가늘고 옅은 갈색이었다. 거기다 파마를 했으니 사자로 보였을 거다. 앞니도 빠졌다. 종로 아이들(읍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사는 아이들로 당시 주류였다) 중에 정은이와 남정이가 나를 놀렸다. “사자다!!!” 하고 놀리면 그 애들을 잡아야 하는 놀이다. 처음에는 아이들이 놀아주는 게 좋아서 기꺼이 했다. 하지만 반복되는 그 ‘놀이’가 애들이 나랑 놀아주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 재미에 따라 나를 놀려먹는 것임을 알게 됐다.
달님반과 해님반으로 나눠졌던 병설유치원에서 내 자리는 없었다. 걔네들은 종로 출신이었고, 나는 읍에서 1킬로 남짓 떨어진 곳에 살았다. 종로에는 피아노 학원도 있었고 미술학원도 있었다. 누구네 집에 피아노를 샀으니, 누구는 체르니를 벌써 들어갔다는 등의 말은 내게 도무지 외계어다. 나는 유치원을 걸어서 다녔다. 먼 길이었지만 다른 방법이 없었다. 나보다 공부 못하는 혜옥한테서 버스 타는 법을 배운 후로 기껏 문명의 편리함을 알았다. 덕분에 백 원으로 과자를 사 먹을지, 버스를 타고 편안하게 집에 갈지 매일 고민했다. 대부분 과자를 골랐다. 자키자키의 짭조름을 맛보면서 오, 십, 십오 하면서 천천히 집으로 향한다. 논길을 걸으면서, 하늘도 보고 들판도 봤다. 가끔씩 아카시아 가지를 꺾어서 손톱에 보랏빛 매니큐어도 발랐다. 그런 추억을 준 시골집은 주류들에게 딱 맞는 놀림거리였다.
종로 패거리는 계집애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엄마가 내 편이 되고, 지지해 줬으면 다시 자존감을 세우는 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으리라. 결핍, 칭찬, 지지, 인정을 어렸을 때 얻었더라면, 남들의 인정에 매달려 살지 않았겠지.
중학생 시절, 친구들이 글씨를 잘 쓴다고 했다. 달리기도 잘했고, 말도 잘했고, 노래도 잘했다. 친구들과의 관계도 좋았다. 제일 잘 나가는 방송반에서 클래식 음악을 틀며 방송까지 했다. 고등학교 선생님이 일본어를 잘한다고 칭찬했고, 한문 선생님이 3년 동안 만점만 받은 내게 상도 주고 칭찬해 줬다. 칭찬이 좋아 그 길을 걸었을까. 한문을 공부했고,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철학을 전공하고, 일본에 갔다.
그래도 부모님 칭찬은 없었다. 내가 가장 바랐던 것은 그들의 인정이었다.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지원군을 가지는 것만큼 든든한 것은 없다. 항상 내 존재를 인정해 주고 자랑스럽게 생각해 주는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주위에 많으면, 힘들어도 기운 내서 살아갈 수 있다. 때때로 타인의 인정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지만, 칭찬은 사람 마음을 흔든다. 화를 내면서 말을 바꾸어, ‘청소해 줘서 고마워. 당신이 최고야.”라고 하면 농담이 섞인 줄 알면서도 미소 짓는 남편만 봐도 그렇다.
칭찬은 힘이다. 의지할 수 있다. 뭉클해 오는 감정이다.
대순진리회에 가서 배운 것 중에 잊지 못하는 것이 있다. 지도했던 언니는 ‘물은 답을 알고 있다.’ 책을 꺼냈다. 물에게 ‘사랑해’라고 말을 하고 사진을 찍으면 물의 결정이 바뀌면서 환하게 빛났다. 반면에 ‘짜증 나’ 한마디에 물은 아름다운 결정을 깨뜨렸다. 우리 몸은 70퍼센트가 물로 구성되기 때문에, 말이 중요하다고 했다.
우리는 말에 상처를 받을 수도 있고, 가슴이 따뜻해지기도 한다. 두려움과 죄책감으로 살았던 내게 누군가 ‘사랑해.’ ‘잘했어.’ ‘네가 자랑스러워.’라고 말해줬다면, 나도 환하게 빛났을 거다. 내가 세상에 중심이 된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그런 빛을 전달해 선한 에너지를 줄 수 있는 사람이 됐을지도 모른다. 다 지난 일이다. 지금은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내가 여기 있다. 늦지 않았다. 이제 인정과 지지를 나눠줄 때다. 먼저, 아이들에게 다가가 ‘엄마는 네가 자랑스러워.’라고, 남편에게도 ‘당신 요리 참 잘해.’ 하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