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잡한 하교와 퇴근시간 우체국이 사람들의 열기로 달아오른 것과 달리 도로는 한산했다. 지원은 우체국 앞 도로에서 주차를 하려고 했다. 도로 옆이라 주행하는 차량이 꽤 신경 쓰였고, 빼곡하게 줄 지은 차들 사이에 끼우다시피 주차해야 해서 겨드랑이에 땀이 났다.
좁은 공간에서 앞코를 들이대는데 차 뒤가 맞지 않았다. 후진하려고 뒤를 보는데 은빛 벤츠가 지원의 차 엉덩이에 코를 바짝 대고 있다. 운전석의 할아버지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차 때문에 후진할 공간이 부족했다. 주차하겠다고 지원이 손짓했다. 그가 차를 약간 빼더니 답답하다듯 시간이 부족한다는 듯, 지원의 행동을 주시했다.
지원이 시간을 끌고 주차로 분투하는데, 그가 빵 하고 클락션을 울렸다. 그는 지원이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얼른 앞으로 치고 들어오더니, 창문을 내리고 뭐라고 욕을 하는 것 같았다.
지원은 몇 분도 기다리지 못하고 화내는 할아버지에게 화가 났다. 일말의 인내심도 없는 할아버지를 비난했다. 다시 ‘나는 여기 주차할 거예요.’라는 시늉했고, “기다리시면 되잖아요.”말했다. 그는 그런 지원의 말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 차를 지원의 차에 바짝 대고 우체통에 편지를 넣고 타이어 바퀴 소리를 내며 쌩하고 사라졌다.
그날 밤 그 사건을 남편에게 말하자,
그가 “네가 동양 여자라서 그렇게 화낸 거 아니야?”라고 물었다.
물론 한눈에 동양 여자로 보이는 지원이 아니라 건장한 젊은 백인 남성이 그러고 있었다면 그는 화를 내거나 욕까지 하진 않았겠다. 지원은 그 일화를 다르게 보고 싶다. 어떤 이유에서 이건 할아버지는 서두르는 자신을 방해하고 앞길을 막는 타인이 싫었던 것.
지원은 아이들의 소음에 너그럽고, 슈퍼 계산대가 느려도 침착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독일 사람들의 침착함이 좋다. 물론 그 속에도 스스로 답답해하고 조바심 내는 사람은 있게 마련. 독일 생활에서 배운 여유를 체화시킨 지원은 다음에 또 그런 일이 일어나면, 마음에 일말의 스크래치도 내지 않으리라 결심한다.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페이스를 가질 권리가 있다. 그걸 존중하고 배려하는 사회, 그런 생활의 똘레랑스를 지원은 독일에서 많이 보아왔고 언제까지나 그걸 독일에서 기대한다.
무리 속에 있으면 지원은 그녀를 보고 살짝 눈빛이 흔들리고 시선을 돌리는 사람들을 본다. 지원이 길을 가다 장애우를 보던지 아님 미친 사람을 보던지, 아니면 다리가 없는 사람을 보았을 때 보이는 비슷한 반응이다. 속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궁리한다. 조심스럽다. 보통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처럼 대할까 아니면 좀 더 친절하게 대할까를 생각하다 그렇다고 특별히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가는 건 실례일 것 같고, 그러다 그들이 무심하게 지나친다.
한 번씩 조깅하다 지나가는 마주치는 정신병을 앓고 있는 아저씨에게 인사한다. 다행히 아저씨는 사람들과 인사 정도는 할 수 있다. 안녕하세요?라는 말에, 유창한 이 지방의 인사말로 반응한다.
“Grüstis.”
평소 혼잣말을 온 동네가 울릴 정도로 크게 하는 그 아저씨는 사람들 앞에서 함구하다 그들이 지나가면 다시 큰소리로 떠들기 시작한다. 지원은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어느 정도 예상되기 때문에 늘 웃는 얼굴로 인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어떨까? 조금 얼떨결 하고, 어색하지 않겠는가.
지원이 금발 스페인 친구와 수다를 떨고 있다. 함께 아이들이 노는 걸 지켜보다가 다가온 사람은 지원을 보고 고민한다. 이 동양 여자는 왜 여기 있는 거지? 이 사람이 내 말을 이해할까. 여러 가지 골치 아픈 고민을 할 바엔 그는 본능적으로 지원의 옆 서 있는 내국인처럼 보이는 스페인 친구에게 다가간다. 이미 스페인 친구는 크게 인사했고 가볍게 농담했다. 오늘 진짜 춥지? 그는 먼저 인사하고 환하게 웃는 스페인 친구에게 시선을 돌리고 대화를 시작한다.
지원은 한 번, 독일어 급수증을 잃어버렸다. 독일어 수업료 환급에 꼭 필요한 서류여서 마지막 희망으로 다녔던 어학원에 재발급을 문의하러 갔다. 지원은 어학원 원장과 마주쳤다. 원장은 ‘네가 무슨 볼 일로 여기 다시 왔니?’라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안 돼. 이런 걸 나한테 달라고 하면 내가 오는 사람들 다 받아줘야겠네?”
원장의 말은 원칙적으로 옳다. 그래서 공손하게 부탁하러 간 것이었는데, 원장의 거만한 태도에 지원은 창피하다 못해 화가 났다. 문제는 그 말이 아니라 그녀의 태도였다. 권력의 창을 휘두르는 듯, ‘네가 잘못했네. 그걸 내가 도와줘야 하니?” 그런 얼굴과 어조는 옆에 있던 비서도 민망해서 어쩔 줄 모르고 지원을 애처롭게 쳐다보게 했다.
원장은 세르비아에서 온 외국인 여성이다. 2017년 독일 전역과 이 도시에 유입한 난민과 외국인 덕분에 어학원은 성황을 이뤘다. 조금 힘이 있다고, 자신이 처음 독일에 와서 당했던 부당한 행위를, 힘없고 약했던 과거 자신과 같은 처지인 외국인 여성, 약자에게 폭력을 행사했다.
아닌 게 아니라 원장은 평소 남자 외국인들만 보면 생글생글 웃으며 친절하게 대했지만, 외국인 여성한테는 인사를 먼저 하지도 인사를 받고도 무시했다. 학원 등록에 대한 문의에는 금을 본 듯 눈을 반짝였고, 학원을 떠나고 부탁하러 오는 외국인 여성은 찬밥처럼 대했다.
어이없는 일을 당해 지원의 눈이 촉촉해지는데도 꾹 참았다. 다행히 그녀를 안쓰럽게 여긴 비서가 새로 급수증을 발급받을 수 있게 도와줬다.
지원은 일본과 중국 유학하고 여러 외국을 여행하고 외국인들과 어울리면서도 동양 여성으로서 특별한 시선을 받은 적이 별로 없다. 독일에서만큼은 조금 달랐다. 백인 남편이 주류인 것과 달리 지원은 비주류였다. 비주류의 지원은 사람들의 무의식에서 나온 무의식적인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지원이 그들과 다르다는 차이를 본능적으로 인식하지만 동등한 사람이라고 인식하지 못한다. 다름에서 오는 차별을 행한다. 차이를 인식하여 차별하는 사람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그들의 관점을 바꾸고 이해시키는 일은 가능하긴 하지만 어려운 일이다. 차이를 근거로 금을 긋고 삶은 제한하는 것은 그들의 문제이므로 내 상관할 바가 아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고, 이성적이지도 않으며 그것도 자신이 인식하지 못하는 무의식에서 나오는 차이에 대한 차별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다. 차별을 받는 입장에서는 더더욱.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와도 같이,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행위에 도덕적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양심에는 호소할 수 있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만났다. 신기한 것은 그 나라에 있을 때 만났던 대다수의 내국인, 다른 나라에서 만난 그들의 모습은 참 다르다. 다른 나라에서는 그 나라의 모든 굴레를 다 던지고, 소통할 수 있어서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만남은 우리 사이의 차이가 사라진다. 같은 외국인이고 우리는 차이를 인식해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다. ‘똘레랑스’ 다름을 전제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나와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