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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더키드 Aug 30. 2020

정면을 바라보라

판단중지?


강남역 사건 이후 우리 사회에서 젠더 이슈는 뜨거운 감자이다. 여성 혐오의 문제에서 시작해 미투 문제로 여전히 진행 중인 사안이기 때문이다. 가까이는 박원순 전서울시장의 사건처럼 미디어를 뜨겁게 장식하는 뉴스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이런 문제에 쉽게 판단내리기 힘들 뿐만 아니라 솔직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기도 어렵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실 확인조차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았기에 주저하게 된다. 그러나 누군가는 이런 미적지근한 태도에 강한 유감을 표시할지 모른다. 당신이 아직 피해자의 고통을 감응하지 못하는 무감각의 소유자라고 비난하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나는 보통 이런 반응이 걱정돼 무대응으로 일관해왔다. 얘기해봤자 그들과는 평행선을 딜릴 게 뻔하니까.



나의 무대응은 짐짓 판단 중지의 외양을 띠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문제를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시끄럽게 싸워봤자 이런 이슈는 감정의 골이 깊어지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나이가 들다 보니 주변에서 꼰대란 소리를 듣고 싶지 않은 이유도 컸다. 지난 몇 년간 나는 대부분 여학생으로 구성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그래서 참으로 말과 행동을 조심하며 지냈다. 나이든 아저씨인 나와 그들 사이에 세대차이를 비롯한 다른 차이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그래도 같이 수업을 듣다 보면 막간의 시간에 이런 저런 젠더 이슈에 관해서 말을 나눴던 기억이 난다. 이해 불가능한 사태를 묵도할 때면 그들의 생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가령, 미러링 같은 현상이 그랬다.



그들이 사는 세상


인터넷 게시판을 뜨겁게 달구는 미러링 같은 현상을 볼 때마다 평소 저게 무슨 효과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지우기 힘들었다. 그냥 말장난이라고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변 몇몇 여성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 당시 나는 그런 반응이 놀라웠다. 그들과 얘기를 나누면서 잊혀지지 않은 단어는 바로 “무기”란 명사였다. 남성 중심의 언어를 벗어나 대항할 수단이 생겼다는 게 그들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 그저 ‘정치적 올바름’ 정도로 성중립적 언어 사용을 고민해봤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언어적 여성 혐오에 대항할 무기로 미러링을 이용한다는 발상이 굉장히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러면서 그들이 사는 세계는 나의 세계와 굉장히 다르구나라는 자각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인터넷 세상에서 태어난 그들이랑 90년대 말 인터넷을 처음 접한 나 같은 세대 사이에는 너무나 큰 캡이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들이 느끼는 여성 차별의 경험의 양상도 세대차이만큼이나 크리라. 예를 들어 소설 <82년생 김지영>이 베스트셀러가 됐을 때 나는 도저히 흥행 이유가 이해가 안 갔다. 여성 차별을 처음부터 끝까지 전시하고 거기에 더 나아가 그 차별이 정신병으로 비화되는 이야기에 수긍이 안 됐기 때문이다. 마치 이 소설은 주인공의 불행을 주변 모든 이에게 돌리는 서사 같았다. 가까운 가족 중에 정신병으로 고통받은 사람을 지켜봐야 했던 나로서는 작가가 그 병의 고통의 실체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커녕 이용했다는 불쾌감까지 들었다. 그러나 이런 차이의 강조가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차이만 보다보면 상대에게 책임을 쉽게 전가하기 때문이다.



순수성의 강박


그렇게 본다면 젠더 문제는 누군가에게 그 원인을 떠넘긴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어떤 특정한 사람, 내지 집단이 그 문제의 원인이라면 그 또는 그들을 고치면 그만이다. 그러나 대개 문제는 구조적이고 따라서 이데올로기적이다. 상대를 배제한다고 해서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나는 근래 순수성을 강조하는 극단중의자들이 젠더이슈에 너무 큰 목소리를 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례로 올해 초 트렌스젠더 여성이 숙대입학이 좌절된 사건이 그렇다. 성전환으로 여성이 된 누군가, 심지어 법원에서 1에서 2로 주민등록번호까지 변경됐는데도 불구하고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입학을 반대한다는 게 무슨 소리인가. 소수자가 또 다른 소수자를 박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적 여성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면서 말이다. 이게 혐오가 아니라면 무엇이 혐오일까.



순수성에 대한 강박. 이런 논리는 히틀러가 유태인을 아우슈비츠에 보냈을 때 논리와 다를 게 없다. 순수 게르만 민족에 집착을 외치면서 말이다. 모든 차별과 혐오는 순수성을 지키려는 압박에서 비롯된다. 차별하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지 않다.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차이에서 차별이라는 논리는 사실판단에서 가치판단을 이끌어내는 전형적 오류이다. 여성이 여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한다면, 남성이 남성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하는 것과 뭐가 다를까. 이런 소모적인 논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모순을 정면으로 바라봐야 한다. 특히나 자신의 정체성에 갇혀 펼치는 논리는 스스로를 쉽게 울타리에 가두고 만다. 자신들끼리 북치고 장구 친다고 이 문제가 해결될까. 상대를 향한 적대는 적대로 되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가뜩이나 풀기 힘든 매듭을 더 꼬이게 만든다.



X와 Y가 아니라 Z


이제 우리는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배제의 논리에서 이것과 저것의 공존의 논리를 고민해봐야 한다. X냐 Y냐 선택에서 벗어냐야 한다. 세상 문제가 알렉산더가 단칼에 끊었다는 고르디우스 매듭처럼 해결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얽히고 설킨 문제일수록 시간이 들어도 한뜸한뜸 풀어낼 수밖에 없다. 어떤 문제가 쉽게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다면 지금까지 이렇게 논란거리가 될 리가 없다. 젠더 이슈도 마찬가지다. 정말로 문제를 해결할 의지가 있다면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이 글이 내게는 그런 대화의 시작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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