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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Apr 14. 2019

올해의 봄

청계천에도 봄이 왔다. 촌스러운 합성사진처럼 꽃 양동이를 누군가 설치해두었는데 나름대로 귀여워서 사진을 찍었다. 나는 꽃 양동이만 찍고 싶었는데 하필 서로 무척 사랑하는 외국인 커플 찍혀버렸다. 꽃 양동이 주변 여행객들의 옷에서도 봄을 발견했다. 분홍 노랑 옷을 맞춰 입고 사진으로 추억을 기념하는 어머니들이 유치원에서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귀여워서 멀찍이 사진을 찍었다. 서로 잃어버릴까 봐 화려한 색으로 맞춰 입은 걸까 아니면 그저 그런 쪽의 취향일 뿐인 걸까. 엄마의 입버릇처럼 나도 나이 먹으면 말하지 않아도 다 알게 될까?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 벚꽃나무가 있다는 것도 오늘에야 알았다. 순간 휘 바람이 불자 물결치며 날리는 벚꽃잎을 찍으려고 달려갔지만 이내 바람이 멈추고 꽃잎은 벌써 바닥에 내려앉아버렸다. 낭만적인 벚꽃잎이 날리든 말든, 바닥에 우아하게 내려앉든 말든 넥타이 부대는 담배를 피우고 바닥에 침을 뱉었다. 뛰어오지 말고 멀리에서 볼걸.


엄마는 매년 봄가을 꽃구경 단풍구경을 빼놓지 않는데 어릴 때는 집 근처에도 꽃나무가 많은걸 굳이 찾아다니며 볼 필요가 없지 않나 생각했다. 뭘 모르고 어렸다. 문득 올해 봄은 새롭고 애틋하다. 봄에는 그리움의 정서가 있다. 봄이 되면 막혔던 것이 풀리고 따뜻한 기운이 스며서 마음도 환해질 것 같은 판타지. 좋은 변화가 일어날 것 같은 괜한 기대.


갑작스레 태국에서 친구들이 한국을 찾았다. 지금 한국이야.라는 메시지를 받고 무척 놀라고 반가웠다. 갑작스러운 일 중 반가운 일은 많지 않은데 이번은  좋은 경우다. 터프한 시기를 보낼 때 큰 위안을 안겨준 친구들을 다시 한국에서 볼 수 있다니. 지난봄 친구들은 일본 여행 중 벚꽃 사진을 꽤나 많이 보내주었다. 친구들도 우리 엄마처럼 꽃놀이를 제대로 하기로 다짐했을까. 석촌 호수와 몇몇 벚꽃길, 고궁에서 찍은 사진을 보내주었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교회에서 역까지 오는 길은 인천에서 제법 유명한 벚꽃 명소인데 오늘 보니 꽃이 활짝 피었다. 아마 비 때문에 예년보다 빨리 질 지도 모른다. 일주일 사이에 꽃잎이 어찌 될지 모르니 잠시 멈춰서 사진을 찍었다. 일주일 동안 여기저기에서 모은 봄 사진을 보니 귀엽다. 봄을 즐기는 사람들, 봄이 지나가는 모양이 귀엽다.



그렇지만 봄의 판타지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좋은 일들 말이다. 길에서 큰돈을 줍거나 로또에 당첨되어 돈을 어떻게 써야 할지 고민한다거나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거나 연봉이 훌쩍 오르거나 여행상품 이벤트에 당첨되거나. 오늘도 오뚜기 50주년 이벤트에 성실하게 참여했지만 당첨되기 글렀다는 슬픈 예감이 벌써 찾아왔다.


내가 좋아하는 기자님이 인스타그램에 쓴 코멘트에 하트를 누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맨날 하는 말이지만... 적당히 나쁘면 끊고 나오지를 못한다. 아주 나쁘면 도망칠 수 있는데. 아주 나쁜 것은 싫지만... 가끔 그 애매한 정도라는 이유로 그 상태에 머무르며 낭비하는 에너지를 생각하면 지긋지긋하다. 진즉 아니라고 그만두자고 했어야 했다.


인생의 멘데토리랄 것은 별로 없지만 한 가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사는 것도 좋지만 싫어하는 일을 하지 않으며 사는 것이다. 싫은 사람과 밥을 먹거나 생각만 해도 질려버리는 회식자리라든가 골치 아픈 사람과의  (특히 하나마나한 재미도 없는 농담들이 섞인) 긴 대화라든가. '아주 나쁜' 것들을 오래 참는 일이라든가. 이런 기준을 적용할 기회가 지나치게 많이 찾아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그냥 내 생각일 뿐이다.



요즘 팀 동료들과 점심메뉴를 정하는 일에 만전을 기하고 있다. 우선 맛있는 걸 먹어야 오전의 나쁜 일을 보상받을 수 있고 오후의 나쁜 일에 대응할 수 있고, 우리가 종로의 봄을 함께 보낼 기회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알 수 없으니까. 매일 맛있는 걸 먹으면서 매 순간을 즐기기로 했다. 종로의 떡볶이집은 웬만큼 접수한 듯하다.


일주일 간 모은 봄 사진들, 모두 귀엽고 행복한 모습들. 나의 진짜 봄은 비교적 전투적이면서 미세먼지스러운 편인데.


엇 잠시만요, 지금 그 모습 굉장히 언짢고 짜증 나는데 올봄을 기념하기 위해 사진 좀 찍고 넘어 갈게요.


할 수는 없으니까.


'아주 나쁜' 일들로부터 탈출하고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 귀여운 봄의 한 장면을 만들기 위해 다음주 참전해야 할 격전지가 많다. 부디 성공적인 봄 을 만들어 내길.  맛있는 떡볶이로 나에게 응원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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