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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Dec 15. 2020

발이 큰 여자

그녀의 신발은 늘 반짝였다. 출근길에만도 나는 수차례 발을 밟히는데 그녀는 전혀 아닌 듯하다. 운동화에 오염이란 것이 없다. 매일 협찬 신발을 신고 행사장에 등장하는 연예인의 것처럼 말끔하다. 성격 탓일지도 모른다. 남들보다 신발 관리에 무심한 나를 돌아보았다. 동생과 엄마는 내 신발을 보면서 일부러 신발을 망가뜨리고 더럽게 만들려고 바닥에 사정없이 문지르거나 벽에 긁고 다니는 것 같다고 했다. 지하철에서도 내 발은 좀 많이 밟히는 편인 거 같다. 앞꿈치 뒤꿈치 가리지 않고 하루에 서너 번은 밟힌다. (밟히는 것보다 언짢은 건 사과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나는 신발과 친하지 않다. 서양권에서 살았다면 그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발이 큰 여자는 한국에서 신발 사기 괴로운 세대에 살았다. 발이 크면 키가 큰다더니 내 신발은 한 시즌을 못 가 작아져 버려서 신발 살 일은 너무 많은데 그건 아주 피하고 싶은 경험이었다. 신발가게에서 정해둔 여자 사이즈엔 내 신발이 없다. 보통 여성용이라 하면 240, 인심 쓰면 245에서 끝이 나버렸다. 구두는 진작 옵션에서 제외시키고 운동화 쪽으로 건너갔다. 운동화에 굳이 남녀를 가를 이유가 뭔지 모르겠지만 운동화라고 더 다양한 사이즈를 만들지도 않는다. 당연히 여성용 운동화엔 내 것이 없다. 결국 남성용 운동화에서 골라야 하는데 그 경험이 불쾌한 건 다 점원들 때문이었다. 사이즈가 어떻게 되세요?라고 물은 후 255mm라고 말하면 화들짝 놀라며 여성용은 그렇게 크게 나오지 않는다고 말한 후 꼭 덧 붙인다. “발이 너무 크시다.” 



조심성 없고 심지어 무례하기까지 한 일을 자주 겪다 보면 당연히 신발 사는 일이 싫어진다. 특히 사춘기를 거치면서 신발 사기와 등을 돌렸다. 신발이란 건 그냥 엄마가 사 오는 거 아무거나 신는 것이 편했다. 지하상가나 쇼핑몰 신발 할인매장 같은 곳을 눈여겨본 적도 없었다. 내 발에 맞는 신발은 그곳에 절대 없으니까. 내가 무슨 신데렐라도 아니고 발에 맞는 신발이 이렇게 간절할 일이냐고. 신발을 살 때 맘 놓고 디자인을 고를 수 있다는 게 얼마나 기분 좋은 경험인지 245mm 미만의 발을 가진 여성들이 충분히 즐기길 바란다. 가끔 신발 매장에 들어가면 우선 “제일 큰 게 몇이에요?”라고 묻는 게 편하다. 그런 질문마저 깔끔하게 한 번에 대화가 마무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발 큰 여자는 참 피곤하다. 


신발 사기의 피로함에서 겨우 해방된 것은 직구를 만난 이후다. 그쪽에서 내 발은 큰 것도 아니었다. 발 볼의 너비, 발등의 높이까지 자비로운 신발들이 넘쳐났다. 답답한 틀에 갇혀 있다 마침내 해방된 나의 불쌍한 발. 무례했던 신발가게 점원들 이제 안녕! 그렇지만 직구 세계를 알았다 한들 너무 오랫동안 신발에 대한 흥미를 모른 채 살았던 터라 나는 여전히 신발에 무관심하다. 구두보단 운동화에 길들여져서 여전히 운동화 생활자로 산다. 평생에 구두 신은 날을 다 모아도 2-3개월이 안 될 것이다. 운동화를 자주 신어서 신발을 험하게(혹은 편하게) 신는 버릇이 생긴 걸까. 아니면 그냥 원래 험하게 신는 걸까. 내 신발은 빨리 더러워지고 헤진다. 신발에 정도 없고 험하게 신는 편이라 애초에 좋은 운동화를 사지도 않는다. 적당한 가격의 적당히 편한 신발을 사서 적당히 신다가 버리게 된다.



내 사정이 이렇다 보니 남들 모르게 신발을 살피기도 한다. 음, 나 같은 사람이군 하고 동질감을 느끼는 신발을 만나면 반갑다. 그런데 그녀의 신발은 놀랍게도 깨끗했다. 가만히 앉아있을 때도 발을 꺾어 신발 옆구리가 잘 상하는 내 신발과 운동화 발등에도 주름 하나 없다. 새 신발도 아닌데.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는데. 우리 둘의 차이가 뭘까. 그녀에 대한 기억이 다 흐릿해져도 그 깨끗한 신발은 선명하게 기억할 수 있을 거 같다. 아마 그녀는 아담한 발 때문에 일찍이 신발 사기의 즐거움을 누린 사람일 것이다. 신발을 소중히 여기고 아끼는 사람이라면 그럴 것이다. 


신발에 정이 없는 나는 가끔 운동화를 빨기 귀찮아진 김에 “어이쿠 운동화 옆구리가 다 갈라졌네.”하고 새로 사기도 하는데. (빨래 귀찮은 김에 운동화 산다는 영국 속담 다들 알고 있잖아.) 나의 신발 관리에 대한 반대급부로 생긴 마음인지, 가끔 그녀처럼 단정하고 말끔한 신발을 오래도록 유지하는 사람을 보면 약간의 존경심이 솟는다. 생활을 잘 다잡고 사는 결기 같은 게 느껴진다. 요즘은 출퇴근 거리도 짧아졌고 외출도 거의 없고 가게에선 실내화로 갈아신게 되니 신발이 더러워지거나 헤지는 속도가 많이 늦어졌다. 그럼 깨끗해진 신발만큼 나의 기개가 늘어났다고 해도 될까. “둥둥 님의 기개가 자연증가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엄지발가락 옆에 전에 없던 굳은살 비슷한 무언가가 생겼다. 구두도 안 신는데 이게 뭘까 했더니 동생은 아무리 편한 신발이라도 하나를 오래 신으면 신발에 맞춰 발 모양이 변한다고 했다. 대화는 의도치 않게 그저 그런 운동화를 신는 게 문제야 라는 쪽으로 흘렀고 또 의도치 않게 이번엔 좋은 운동화를 사서 신으라며 엄마가 돈을 쥐어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번에 제법 괜찮은 운동화를 사면 주름도 덜 생기고 상처도 덜 생기도록, 자연 증가된 기개를 발휘해 봐야지.


<이미지 출처: 영화 '에놀라 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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