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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r 26. 2021

혹시 초능력?

10년 전쯤, 합정역 근처에 축지법을 가르치는 학원이 있었다. '나도 봤다.', '전단지도 있더라. '하는 소문이 돌았고 한 작가가 직업적 호기심을 참지 못(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이템은 아닌지 궁금해서) 정말 축지법을 가르치는 것인지 이상한 사이비 종교는 아닌지 확인한다고 직접 그 학원엘 찾아갔다. 학원 문을 열어보니 방안에 삼각형을 그려놓고 사람들이 뱅글뱅글 돌면서 빠른 걸음을 걷고 있었다고 했다. 축지법을 위한 기초 훈련이라면서 빨리 걷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작가가 원장에게 축지법을 직접 봐야만 믿고 등록할 수 있으니 보여달라 했고 그는 이렇게 답했다.      


물론 보여줄 수 있지만 지금 내가 부산까지 다녀오는 축지법을 보여주면 당신이 너무 놀라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받을 것이다. 그러니 보여줄 수 없다.


그 학원에서 빠른 걸음을 연습하던 사람들은 무슨 마음이었을까. 정말 축지법을 배울 수 있다고 믿은 것일까. 축지를 배워서 뭘 하고 싶은 걸까. 초능력에 대한 어떤 간절함이 그곳으로 인도했을까. 혹시 허경영도 그 학원에 다녔을까. 당연히 작가는 축지법 학원에 등록하지 않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나는 학원이 계속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세상엔 아직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게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린이들도 초능력을 믿는 때가 있다. 나도 3학년 때까지는 사람이 훈련을 통해 날 수 있다고 믿었다. 빠른 걸음을 연습하며 축지법을 배우는 사람들처럼 빨리 달리기를 하다 보면 추진력을 얻어 날 수 있는 줄 알았다. 믿음이 어찌나 견고했던지 가끔은 꿈에서 내 발이 비행기처럼 추진력을 얻어 놀이터 위를 날아다니기도 했다. 어릴 때 보았던 ‘제트 소년 마르스’라는 만화에서처럼 팔을 삼각 모양으로 쭉 펴면 그 사이에 망토가 촤르르 펼쳐지면서 날아다니는 것이다.      


그 보다 더 어릴 땐 우리가 가진 마론인형이 살아 있다고 진지하게 믿었다. 모든 인형이 살아 있는 것은 아니고 아주 소수의 살아 있는 인형이 있는데 내가 그 인형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다. 어느 날 버섯머리와 함께 한 살 많은 동네 친구네 집에 놀러 다. 학교에 입학한 후 유치원생들보다 바빠진 탓에 자주 만날 수가 없어서 토요일에 친구 집을 찾다. 오랜만에 인형놀이를 하고 헤어지려는데 친구가 내게 귓속말을 했다.      


사실은 내 인형이 살아있어. 어젯밤에는 화장실도 데려다줬어.    


맙소사. 살아있는 인형을 네가 만나버렸구나. 내가 아니라 네가! 어찌나 부럽고 아쉽던지. 이렇게 말도 안 되는 믿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러니까 축지법 학원에 다니는 사람들도 지금이 그런 때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간에게 정말 초능력이 있는 걸까? 하나님께서 정말 평범함을 초월하는 어떤 능력을 슬쩍 심어두셨을까? 월등하게 뛰어난 능력을 초능력이라고 한다면 맞는 것도 같다. 축복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서번트 증후군이나 과잉기억 증후군 같은 경우도 있고.           


일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존재하는 초능력은 육아하는 엄마에게 있다. 실제로 ‘초능력’을 검색하면 육아에 대한 글이 가장 많다. 역시 초능력 없이는 육아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친구들을 보면 실제 육아를 시작하고 처음 몇 년 동안 엄마는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며 산다. 잠을 참고, 하고 싶은 것들을 참고, 무엇보다 울컥하는 마음을 참고. 체력의 한계를 뛰어넘어 아이를 키운다. (임신 중에는 커피와 술, 매운 떡볶이를 참지.) 그들의 육아를 보면 엄마가 되기로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닫는다. 엄마가 되기로 ‘결정’하는 건 아주 많은 ‘포기’를 의미하니까. 최근에 한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솔직히 이렇게 많이 포기해야 할 줄은 몰랐거든.


하긴, 겪어보기 전에 어떻게 온전히 예측할 수 있겠어. 새로운 존재를 받아들이고 양육한다는 것의 의미를.



쌍둥이를 키우던 친구는 목에서 뇌로 가는 혈관의 혈액순환이 원활하지 못해 입원을 하기도 했는데 의사 선생님은 ‘고된 육아’를 원인으로 지목하셨다. 그때 친구에겐 초능력이 부족했다. 초능력이 있었으면 병원 신세는 면했을지도 모르지. 아이가 성장의 한 계단을 오를 때 아이를 계단 위로 밀어 올려주는 엄마의 고통을 아이들은 커서 기억도 못 한다는 게 조금 억울하기까지 하다. ‘내 친구들 이렇게 고생하며 너희들 키우는데, 기억을 못 하면 안 되는데.’ 그러나 정작 엄마의 고생을 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엄마들이 ‘나중에 꼭 너 같은 자식 낳아봐라.’ 하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우리 엄마는 요즘도 동생에게 그 말을 자주 한다.      


아주 꼭 너 같은 딸 낳아봐라.
엄마, 결혼을 안 할 건데 어떻게 딸을 낳아.
그러니까. 너 같은 딸을 낳아보라고!
아니 결혼을 안 하는데 딸을 어떻게 낳냐고.
그러니까!      


격양되는 말싸움 핑퐁의 무한 굴레. 엄마는 요즘도 초능력을 발휘해 육아를 하는 건 지도 모르지. 예전에 친구가 육아는 처음 40년이 힘들다고 했다. 엄마의 동생 육아는 아직 진행 중인 게 맞다. 엄마는 아직도 초능력자인 것이다.



요즘 내가 자주 생각하는 방식으로 접근하자면 초능력을 본 후에 초능력에 대한 인간의 탐구가 시작된 것일지 초능력에 대한 욕망이 있어 초능력에 대한 무수한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인지 궁금하다. 어떤 이야기들은 욕망이 먼저 형태를 만들고 그에 맞춰 창조되기도 하니까. 예를 들면 UFO의 형태가 늘 원반형이나 접시모양이었던 시절이 오랫동안 이어졌던 것처럼. 갖지 못한 것에 대한 욕망이 만드는 수많은 이야기가 결국엔 진짜가 되는 그 과정이 진짜 초능력의 능력인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숨겨두신 초능력은 그러니까, 욕망일 지도.



<이미지 출처: 영화 'X-man 퍼스트 클래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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