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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Apr 29. 2021

소화제 인생

내가 남들보다 많이 먹는 약이 바로 소화제다. 스무 살 무렵부터 먹은 활명수를 줄 세우면, 아니다. 줄은 세우지 말자. 암튼 집에도 활명수 한 박스 정도, 알약으로 된 소화제 몇 개 정도는 상비약으로 둘 만큼 소화제를 자주 먹는다. 음식을 많이 급하게 먹는다는 말이다. 쩝.     


종로에서 일할 때, 저녁에 찾아오는 친구들과 고정으로 가던 코스가 있다. '보름' 떡볶이집(지금은 없어진 것 같은데, 사이다 서비스 주시던 이모님, 고마웠어요.)을 거쳐 '그레인 바운더리'로 간다. 떡볶이에 사리를 풍족하게 넣고 먹다 보면 가끔은 밥을 볶을 수 없을 만큼 숨이 차게 배가 불렀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째서 경험이 전혀 학습되지 않는 걸까. 매번 욕심껏 시키고 급하게 먹다가 배가 터질 것 같은 상황이 된다. 거기에서 멈춰야 하거늘, '그레인 바운더리'로 가면 디저트를 이것저것 시킨다. 우리가 좋아하는 바나나 푸딩을 꼭 시키고 쿠키, 케이크까지 고른다. 이야기하면서 한입 두입 먹다 보면 결국 소화제를 찾게 되는 거지. 처음 활명수를 먹던 날엔 “오늘 좀 오버했다. 그렇지?”, “우리 오늘 좀 많이 먹었네.” 하고 서로 껄껄 웃었는데 두 번 세 번 반복되다 보니 그건 그냥 당연한 루틴이었다. 차라리 소화제를 미리 챙겨놓고 만나는 게 나을 뻔했다. 그렇다고 정말 소화제를 챙기고 만나지는 않았다. 그건 미련하게 많이 먹을 작정을 하는 것 같으니까. 대신 활명수를 마시면서 이런 대화를 했다.     


다음에 먹을 땐 중간에 꼭 내 손을 잡아줘. 
내가? 네가 날 잡아주는 게 아니고?     



아, 그런데 이런 대화 익숙하다. 먹을 걸 앞에 두고 내가 얼마나 흔하게 이성을 통제하지 못하고 식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면 이런 대화가 다 익숙할까. 나이를 먹다 보니 위장의 운동 속도가 느려진 것이 분명히 느껴진다. 밥을 먹고 나면 서너 시간쯤 뒤에야 배가 불러오는데, 이런 시차 때문에 내가 얼마나 배가 부른 지 가늠할 수 없다는 문제가 생겼다. 여기에선 학습효과가 좀 생겼다. '지금 이 정도 포만감이면 분명히 몇 시간 후에 소화제를 찾게 된다.' 를 알게 됐다. 아직 좀 더 먹어도 될 것 같은 그 순간 멈춰야 몇 시간 후에 괴롭지 않을텐데, 당장은  배에 여유가 있는 것처럼 느껴지니까 혹시나 하고 더 먹다가 꼭 봉변을 당한다.서너 시간 후에 소화제를 먹고 있는 나. 다행히 소화제에 내성이 생기지는 않는 것 같다.      


20대 시절, 대학을 졸업하고 오랜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가 “요즘도 활명수 마시니?” 하고 물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소화제를 많이 먹는다는 걸 처음으로 인지하게 해 준 말이었다. “요즘도 빵 먹니?”도 아니고 “요즘도 활명수 마시니?”라니. 그때부터, 아니 그전부터 지금까지 절제를 모르고 먹어재낀 인생인 것이다. 지난주에도 소화제를 먹었다. 요즘은 배가 부른 게 아니라 그냥 뭔가를 먹고 싶다. 배는 충분히 부른데 그냥 뭘 씹고 싶어서 먹는다. 중세 귀족들 중엔 음식을 삼키지 않고 씹고 버리는 사치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다던데, 혹시 나처럼 배는 부른데 뭘 씹고 싶었나?     



회사에 다닐 때도 소화제를 늘 서랍에 두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소화제를 먹는 이유는 배가 부른 걸 무시하고 많이 먹어서가 아니었다. 불편한 사람과 밥을 먹거나 불편한 회의를 하면 반드시 체하는 진실의 거울 같은 위를 가지고 있어서였다. 그걸 잘 알고 있는바, 웬만하면 불편한 사람과 밥 먹는 일을 피하지만 완전히 피할 수는 없고, 불편한 회의는 더더욱 피할 수가 없으니 소화제가 상시 필요했다.  나를 소화제 먹게 했던 주요 인물들이 떠오른다. 생각만 해도 속이 더부룩해지는 기분.얼마 전 만난 친구가 소시지와 과자, 과일을 쉬지 않고 까먹으면서      


나 요즘 계속 이렇게 먹어. 이상하지? 나 원래 이렇게 먹지 않았는데.


하고 말했다. 


그래, 그렇게 먹는 건 원래 난데. 


친구네 집에도 활명수 한 박스 들여줘야 할지도 모른다. 친구가 먹는 건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내가 먹는 건 만성적인 일이라 내가 누굴 걱정할 상황은 아니지만. 느려진 위장의 소화 속도와 식욕 사이의 평화를 위해 요즘 그나마 씹는 횟수와 속도에 신경을 쓰려고 노력 중이다. 조금 더 오래 씹고, 천천히 씹어보려 애쓴다. 애만 쓴다. 어제도 노화중인 위장을 무시하고 먹어댄 탓에 더부룩한 상태로 잠이 들었는데, 그래서인지 오늘은 아침부터 식욕이 어제 같지 않다. 그래도 먹을 건 다 챙겨서 열심히 먹었다. 며칠 전에 집에 있던 마지막 소화제 털어먹어서 내일은 다시 소화제를 사야 한다. 내성이 없는 것 같아 다행이지만 그래도 약은 약인데, 이왕이면 소화제 없는 생활이 가능하도록 먹는 속도를 최대한 조절해봐야겠다. 사실 더 좋은 건 먹는 양을 조절하는 거겠다. 욕심을 좀 어떻게 좀. 응?



<이미지 출처: 영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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