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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May 09. 2016

한국적인  어버이날

어버이날에는 백화점 상품권을 준비하는 가풍을 잇기 위해 토요일 오후 백화점을 찾았다. 아래층으로 내려와 백화점을 빠져나가기 전에 뭔가 허전한 생각이 든다.


음... 카네이션은... 작년에도 안 샀는데.  


어버이날에 나만 카네이션을 사지 않는 건 아니었나 보지? 올해 카네이션 거래량은 5년 만에 33.3%나 줄었다고 한다. 국내 카네이션 재배 면적은 2010년 125㏊에서 2014년 72㏊로 줄었는데 줄어든 국내 생산량의 자리는 중국산이 채운다. ‘made in china’의 위엄이란. 케냐 공항에서 고르는 기념품에도 새겨진 그 이름.


나는 카네이션을 좋아하지 않는다. 왜 어버이날에 카네이션을 선물하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예쁘지 않은 꽃이 어버이날의 심벌이 된 것은 애초에 판매량이 적은 꽃을 밀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라고 혼자만의 가설을 세워봤다. 가설은 틀렸다. 안나라는 미국 언니가 생전에 어머니가 좋아했던 카네이션 꽃을 영전에 마치고 이웃에게 나누어 주면서 카네이션이 퍼지기시작했다고 한다.



미국 언니의 어머니가 좋아했던 카네이션을 한국 어머니들은 해마다 가슴에 달게 되었는데 이젠 그 꽃을 중국에서 들여온다. 한국적인 정서가 부족한 어버이 날이다. 몇 해 간 사지 않았지만 올해는 어쩐지 꽃 한 송이는 있어야 어버이날 선물이 완성되는 느낌인데. 그럼 나는 한국적인 정서를 담은 카네이션 케이크를 사야지. 꽉 찬 홀 케이크는 미국적인 느낌이니까 나는 여백의 미가 있는 컵케이크로 한국인의 정서를 더해보자. (고 우겨보자.)


사이드 디쉬가 될 카네이션 컵케이크를 정성 들여 고르고 메인 디쉬가 될 백화점 상품권은 고급지게 금색 봉투에 넣었다. 어린이날에 특식이 없어 서운했다는 서른 짤 둘째 딸을 위해 토끼 모양 컵케이크도 샀다. 마침 토끼가 돼지 같이 생겼다.


쑥스러워서 ‘엄마 사랑해요’로 끝나는 카드는 쓰지 않았다. 엄마에게 선물을 내밀자 역시 컵케이크는 ‘어머, 이게 뭐야?’ 하 바로 쓱 한쪽으로 밀어버린다. 예상대로다. 역시 나의 선물 구성은 참으로 한국적인 정서를 고려한 것이었다. 백화점 상품권에 대해 엄마는 또 형식적으로


아유. 자꾸 돈 써서 어떡하니.


라고 말했다.


어버이날 카드보다 내가 엄마에게 자주 썼던 것은 반성문인데 둘의 공통점은 모두 ‘엄마 사랑해요’로 끝난다는 것이다. 반성문이야 말로 작문 훈련의 실전 판. 노트 한 장을 꽉 채워내야 하는 반성문을 쓰는데 엄마가 주는 시간은 고작 30분. '엄마 잘못했어요.' 외엔 할 말이 없는 나는 그 긴 여백을 채우기 위해 나와 엄마 사이의 모든 스토리를 복기해야 했다. 하지만 에피소드가 지나치게 아름답거나 행복면 곤란하다.


이 놈이! 혼나는 마당에 지금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 거냐?


하고 더 혼날 수 있다. 그래서 내 반성문은 주로 이러한 플롯으로 흐른다.


엄마, 이번 일은 잘못했어요. 제가 뭘 잘못했는지 뼈에 사무치게 반성하고 있어요. 생각해보니 저번 일도 잘못했어요. 그때도 반성문을 썼는데 또 잘못해서 미안해요. 앞으로 저는 엄마의 품격에 어울리도록 발전하는 모습으로 제 결심을 보여 드릴게요. 매일 매일 오늘의 저를 반성하고 절치부심하여 엄마가 아! 하고 저의 변화를 충분히 느낄 만큼 달라지도록 노력할 거예요. 이렇게 못난 딸을 사랑하여 주시고 기회를 주시는 어머니의 깊은 사랑에 감사드려요. 저 같은 딸 키우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시고 사랑을 쏟아주시는 은혜 갚을 길이 없네요. 엄마 사랑해요!


나는 내방에서 우주의 모든 기운을 모아 땀 흘리며 손 저리게 쓴 반성문을 곱게 받쳐 들고 주방에서 등 돌린 채 요리 중인 엄마에게 다가간다.



엄마... 다 썼어요...


탁! 낚아채는 엄마의 손에서 한기가 느껴지지만 쫄면 안 된다. 제대로 이겨내야 한다. 오늘의 갈등이 내일까지 넘어가지 않도록 나는 저 반성문과 함께 이 순간을 이겨내야 한다. 내가 어버이날 카드를 쓰지 않는 이유는 ‘엄마 사랑해요.’에서 반성문 쓰던 시절의 쓰린 기억이 올라오기 때문이다. (라고 우겨본다.)

어버이 날이라고 둘째 딸은 카네이션을 사 왔는데 마침 컵케이크 모양이다. 서로 통하는 데가 어쩌다 보니 있었나 보지? 둘째 딸은 어버이날 선물로 피자를 선물한다. 한국적 정서를 위해 애썼는데, 둘째 딸이 미국 물을 끼얹었다. 눈치 없는 녀석.


어버이날 선물의 마무리는 새로 생긴 아울렛 식품관에서 먹어볼 랍스터였는데 엄마가 발목을 다치는 바람에 다음으로 미루었다. 빵 사느라 거지가 되었는데 어쩐지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불효를 용서하세요. 어머니, 이런 오늘의 저를 반성합니다. 엄마 사랑해요.



진짜 선물은 매일 매일 엄마랑 TV 볼 때 대꾸 잘해주는 거, 한 달에 한 번 맛있는 거 먹으러 같이 나가고 엄마가 영화 보자고 할 때 보기 싫은 영화도 참고 봐주는 거. 엄마가 했던 말 또 하고 듣기 싫은 잔소리 여러 번 할 때 짜증 부리지 않고 들어주는 것 일 텐데. 그런 노력을 하기 싫어서 모른 척하다가 일 년에 한 번 선물로 퉁 치려는 못난 마음이야 말로 반성문을 써야 할 일이다. 그래서 오늘은 복면가왕 보면서 엄마의 아는 척을 곱게 참아주었다. 나는 매일 매일 절치부심하여 엄마가 아! 하고 변화를 충분히 느낄 만큼 달라지도록 노력하기로 했다. 쩝. 우선 노력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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