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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nderPaul Dec 31. 2017

싫어하는 게 많아서 죄송해요.

싫어하는 자리에도 갈 줄 알아야지.


엄마가 나에게 사회생활에 대해 해준 첫 번째 조언이었다. 평소 같으면.


치. 뭐 그런 얘길 해.


할 수도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회식자리가 싫어서 자주 도망치는 걸 알고 엄마는 그런 자리도 억지로 가서 앉아있어야 한다고 했다. 술 먹고 하는 시시한 농담보다 더 힘든 건 취한 채 진지한 얘기하는 사람들이었다. 회식이란 대체로 진지하거나 시시껄렁한 농담의 랠리가 사방에서 이어진 후에야 파장한다. 정신이 멀쩡한 나는 새벽 2시에 택시비로 4만원을 날려야 하는 상황을 원망하며 오들오들 (혹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사람 많은 게 싫고, 지루한 대화도 싫고, 억지로 권하는 술잔도 싫고 눈치 보며 앉아있는 것도 싫고 할증 붙은 택시비는 그중 가장 싫은데 어떻게 회식에 가고 싶을 수 있겠어요. 어머니.) 싫은 걸 어떡해. 이미 싫은데 억지로 하고 있는 게 많단 말이야.


대신 퇴근 후 가까운 동료들과 사케 집에서 두부 스테이크를 썰어먹고 생선구이와 은행 꼬치를 빼먹는 건 좋았다. 상수 언저리에서 와인과 치즈를 오물거리는 것도 한동안 좋아했다. 단골집 주인아저씨가 서비스로 내주는 캐슈너트 닭볶음도 좋았다. 친구들이 농담 사이에 슬쩍 넣어주는 진지한 충고 한두 마디도 좋았다.


새해 계획을 세우려고 몇 자 적다 관두고 방 정리를 시작했다. 매년 새해맞이로 뭔가 더하기보단 덜어내는 일을 자주 한다. 골라낸 옷을 의류수거함에 욱여넣을 때의 짜릿함. 분리수거 쓰레기를 버릴 때의 해방감. 책상 서랍을 자꾸 비울 때의 행복. 흔적을 지우는 기쁨. 주변을 정리할 때 오는 충만감. 그런 기분에 취해 더더더 많이 정리했다. 버리기에 중독된 것이 분명하다. 어젯밤엔 무너지기 직전의 협탁 위 책을 갈무리하면서 헌책방에 팔만한 책을 선별했다. 추려낸 대여섯 권을 바닥에 쌓아놓고 읽기 시작했다. 내일 팔려면 오늘 밤에 완독해야 한다. 읽으려고 보니 또 게 중 몇 권은 정말 팔아도 되나 다시 망설여진다. 결국 3권을 마저 읽고 오늘 헌책방에서 17,400원으로 교환했다. 아싸!


매년 연말에 방을 청소하고 내다 버리는 것처럼 흔한 풍경은 성탄 카드를 만드는 일이었다. 빨간 종이 초록 종이를 오리고 손에 검은 딱 풀 자국이 배기도록 조각을 붙였다. 내 방이 카드 공장인 것처럼 수십 장을 만들었다. 수년간 얼마나 많은 산타 수염과 허리 벨트와 단추를 붙여댔는지. 아직도 남은 눈썹이랑 모자 조각 같은 게 지퍼백에 두툼하게 남아있다. 시작은 늘 몇몇에게만 직접 만든 카드를 주자는 것이지만 이왕 만들 거 이 사람도 주고 저 사람도 줄까 하다 보면 결국 카드 공장 노동자가 되는 것이다. 마지막 카드를 만든 것은 3-4년 전이다. 요즘 왜 직접 만든 카드 안주냐고 타박하는 친구 때문에 몇 장의 카드를 만들어 가까운 친구들에게 성탄 카드를 썼다. 올해도 카드를 몇 장만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닌데 귀찮아서 관뒀다. 이제 작은 책상 앞에 앉아서 그리고 오리고 붙이는 게 다 귀찮아졌다. 카드를 쓰는 것도 귀찮고.


성탄카드에 쓸 말과 생일카드에 쓸 말이 비슷하니까 생일카드에 쓰면 되지 뭐. 그리고 카드에 쓸 말은 직접 하면 더 좋잖아.


스스로 만든 논리에 설득당했다. 하지만 나 같은 류의 사람이 글로도 못하는 걸 말로 할 리가 없다. 그저 그런 말이 아니라 정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카드를 만들까 하다 결국 그만둔 것은 사실 귀찮아서가 아니었다. 말의 무게가 부담스러워서 며칠 고민하다 다음 해로 넘겨버린 것이다.


올해 가장 많이 했던 기도는 “하나님, 싫은 게 너무 많아서 죄송해요.”였다. 매주 반성하고 잘못을 시인하면서 다시 일주일을 똑같이 살고 와서 같은 기도를 하다가 어느 날부터 그렇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싫은 게 많아요?” 하고 나를 지으신 분에게 묻기도 했는데 당황하셨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걸 이제야 묻다니.” 혹은 “의도한 대로 다 되는 건 아니라는 거 알잖아. 내가 그렇게 지으려고 했던 건 아니야.” 쯤의 어딘가.


무언가를 싫어하고 싶은 강렬한 자극에서 하루도 자유로울 수 없었다. 매일 무엇이든 미워할 수 있는 이유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을 때조차 작은 소음마저 미워할 수 있는 이유를 순식간에 찾아내 불평한다. 늘 비슷한 패턴이란 것도 안다. 싫어지는 과정과 의류수거함에 헌 옷을 욱여넣듯, 재활용 쓰레기를 버리듯 후련하게 버리는 과정. 싫은 게 새로 생기는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싫은 게 더 싫어지는 것도 못지않게 괴로운 일이다. 엄마가 아무리 충고해도 나는 싫어하는 걸 받아들이는 데 실패했다. 그렇다. 나는 지금 버리기 병과 싫어지기 병, 싫어지는 게 싫어지기 병. 세 가지를 동시에 앓고 있다.


하나님, 대체 어떻게 된 거죠? 저는 지하철에서 열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새치기하는 사람을 싫어해요. 공공장소에서 큰 소리로 오래 떠드는 거 싫어해요. 악 쓰며 우는 아이를 방치하는 부모를 싫어하고요. 약속을 함부로 어기는 게 싫어요. 말의 엄중함을 모르는 것도 싫어요. 무례함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게 싫고요. 듣기 싫은 노래가 계속 들리는 것도 싫고요. 기다리는 것도 싫어요. 받기 싫은 전화가 계속 오는 것도 싫고요. 먹고 싶은 빵이 솔드 아웃된 것도 좀 싫어요. 이건 오이랑 김치가 싫은 거랑은 좀 다른 문제예요. 그리고 이런 모든 것들의 리스트를 계속 적을 수 있다는 것이 싫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게 싫지 않데요?   


어젯밤 끄적이다 관둔 새해 계획은 몇 년째 비슷한 내용이다. 이런 뻔한 계획 말고 단순하지만 실제적이고도 어려운 도전 계획을 세워야 하는 건 아닐까. 하루 한 번 아무나 칭찬하기. 하루 한 번 엄마에게 잔소리 참기. 일주일에 한 번 사고 싶은 거 참기. 같은 것들. 그리고 싫어하는 거 하나 좋아하기.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 집어치우자. 암튼 하나님, 지금도 싫어하는 게 너무 많아서 죄송해요. 그래도 남들에게 최대한 불편 끼치지 않으면서 싫어하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그런데 하나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에게 가장 필요한 새해 계획은 어쩌면 “기대하기”가 아닐까요? 무시무시하네요. 좀 있다가 송구영신예배 때 저랑 얘기 좀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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