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레나 페란테, 나폴리 4부작
사로잡는 이야기에 홀려 정신 못 차리게 황홀한 시간을 보내는 건 오랜만이라 더 행복했다. 폴 오스터에게 첫 소설부터 빨려 들었듯이, 밀란 쿤데라, 코멕 매카시, 앤 타일러의 소설을 놓을 수 없었던 것과 같은 시간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미 이런 과정을 겪었던 전 세계 독자들처럼 나도 페란테 열병을 앓게 되었다.
그것은 사적인 감정 중에서도 가장 치졸하고 유치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타인의 마음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위안에서 시작됐다. 레누 이기도 하고 릴라 이기도 한 감정들을 죄책감 없이 풀어놓을 수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와 인생은 지루할 틈 없이 나를 사로잡았다.
‘인생이란 한 순간에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란 진부한 말 조차 짜릿하게 느껴질 만큼 모든 문장과 상황에 완벽히 동화되어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부족하기 때문에 노력했던 레누 안에서 많은 나를 보기도 했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는 한 번도 뛰어나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 뒤처지지 않는 것이 목표였다. 당연히 칭찬에도 별로 기쁘지 않았고 지적에는 크게 상처받았다. 다만 레누는 결국 재능을 인정받아 성공했다는 점이 나와의 차이겠지.
경쟁할 필요 없이 누구의 강요도 없이 나를 자유롭게 풀어줄 수 있는 것은 글쓰기뿐이었다. 가방엔 떠오르는 생각을 휘갈겨놓을 수첩과 펜을 항상 챙겨 다녔다. 가족들이 모두 자는 새벽과 이른 아침에 수시로 컴퓨터를 켜서 두서없는 생각을 기록했다. 유치하고 부끄러운 잡문이지만 어차피 평가도 인정도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 자체로 의미가 충분했고 행복했다. 한참 후에 다시 읽으면서 과거의 나를 교정하고 평가하는 것도 나만이 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기쁨이었다.
하루도 무엇을 기록하지 않는 날이 없었다. 한동안 그랬다. 심지어 오전과 오후의 기록이 같은 말의 반복일지라도 상관없었다. 그냥 머릿속 생각을 끄집어내 남겨둘 수 있다는 것이 마냥 행복했다. 다행스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었지만 그 하나가 너무 좋았다. 모순 덩어리 감정을 꺼내보는 죄책감과 쾌감 사이에서 규범을 무너뜨리고 정돈하지 않아도 된다는 아찔함에 취했다.
나는 평생 두려움을 이겨내지 못할 것이다. 말을 잘못할까 봐, 너무 과장된 어조로 말할까 봐,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을까 봐, 옹졸한 마음을 들킬까 봐, 흥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놓지 못할까 봐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아갈 것이다.
열거해봤자 모순투성이였을 것이다. 나는 스테파노가 릴라를 파티에 가지 못하게 할까 봐 두려우면서도 파티에 가는 것을 허락할까 봐 두려웠다. 릴라가 솔라라 형제를 만나러 갈 때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을까 봐, 그녀의 아름다움이 별처럼 빛을 발해 파티에 모인 사람들이 그 아름다움을 한 조각이라도 소유하기 위해서 열을 올리게 될까 봐 두려웠다. 릴라가 사투리로 말을 할까 봐도 두려웠다. 뭔가 천박한 말을 해서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 졸업이라는 것을 드러낼까 봐 두려웠다. 그러면서도 릴라가 입을 여는 순간 모두 그녀의 명석함에 매료될까 봐 두려웠다.
레누의 감정이 그 시절 나의 마음과 흡사했다. 처음엔 순수한 취미였는데 욕심을 내기 시작하자 도리어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작가란 직업을 가지면서 사적인 기록을 잃었다. 문장의 부족함을 스스로 지적해야 하는 것을 이제 견뎌낼 수가 없었다. 지적을 견딜 수 없었던 게 아니라 쓰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 이렇게 엉망인 채로 쓸 수 없었다. 머릿속엔 꺼내지 못한 생각들이 썩어가고 있는데도 도저히 적을 수가 없었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가 한 문장도 쓰지 못하고 체념하기가 다반사였다. 순수한 취미생활과 해갈의 의미로만 여겼던 일인데, 어느새 나는 나의 가장 날카로운 감시자가 되었다.
글을 쓰는 동안 생각을 더 정돈된 형태로 만들었던 걸까? 복잡한 마음이 하나의 단어로 완성되었을까? 성숙한 인격을 가질 수 있게 되었을까? 어느 것도 아니었다. 글쓰기는 신앙생활이 아니니까 당연하다. 오히려 미움과 질투와 열등감을 활짝 피어나게 했다. 나쁜 감정의 극단을 향해 전속력으로 내달리도록 내버려 둔 적이 많았고 그런 기록을 읽으면서 스스로에게 더 가혹해졌다. 가슴에 금기로 묶어둔 것에 대해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조이스 캐럴의 말이 바로 그런 상황에 가장 들어맞았다. 글쓰기를 통해 나는 나를 대면했다. 그렇게 찾은 모습이 낯가림이 많고 싫은 내색이 어렵지 않은 까탈 쟁이였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그 안에서 어떤 나를 발견하든 상관없이 지금도 나에게 가장 순수한 기쁨을 주는 일은 십수 년이 지났어도 글쓰기뿐이다. 어떤 류의 글쓰기에서도 어떤 형태의 즐거움을 찾아낼 수 있다. 이 행복한 취미가 나를 새로운 세계로 인도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언젠가는. 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