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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재희 Oct 24. 2021

리듬 앤 블루스

〈을밀대〉 기다란 줄을 기다려 기다란 젓가락으로 기다란 면을 먹는 순간.

'오늘도 분명 줄이 길겠지?'<을밀대>로 걸어가는 길에는 늘 이런 생각이 든다. 사실 해마다 계절이 변하고 있음을 냉면집 앞을 보고 느낄 정도로 줄이 늘어지는 풍경은 낯선 모습이 아니다. 벚꽃이 휘날리는 봄, 낮엔 긴 팔이 살짝 더워져 땀이 '송골'하고 보이면 냉면집 앞에도 송골송골 사람이 모이기 시작한다. 초복을 알리며 본격적으로 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에는 점심이고 저녁이고 문전성시를 이룬다. 이럴 때는 들어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기보다 언제 들어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만든다. 더운 날 밖에 서 있으면 땀이 주르륵 떨어지는데도 냉면을 포기할 수가 없다. 땀을 빼고 시뻘건 얼굴로 마시는 국물의 첫 모금이 정말로 환상적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찜질방에서 식혜 대신 냉면 육수를 팔아줬으면 좋겠다. 육수 먹으러 찜질방 갈 텐데.


날이 시원해지는 계절이 다가오면 기다란 줄도 조금씩 짧아진다. 저녁엔 바로 들어가서 먹을 수 있는 수준이 된다. 겨울에는 평양냉면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 몇몇이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데 그렇다고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제는 겨울의 평양냉면이 얼마나 맛있는지 아는 사람들은 다 알아버린 건 아닌가 싶은 수준이다. 아무튼, 냉면집 앞에서 줄을 서서 기다린다는 건 아주 익숙한 일지만, 겨울에는 겨울이라 먹고 싶고, 여름에는 여름이라 먹고 싶은 나에게도 <을밀대>의 기다란 줄은 냉면을 포기하게 만드는 수준이다.


집에서 너무 먼 곳에 있는 것도 그렇고, 멀리 갔는데 줄을 한참 서야 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렇게까지 가지 않아도 맛있는 평양냉면을 먹을 수 있는 곳들이 많으니 <을밀대>까지는 쉽사리 갈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가까운 곳에서 먹어도 충분히 행복하고 즐거우니 <을밀대>는 자연스레 나와 멀어졌다. 하지만 이렇게 각 잡고 평양냉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을밀대>를 빠지게 할 수는 없었다. 오랜만에 마음먹고 <을밀대>를 찾았다.


더위가 오기 전 봄의 기운이 완연한 날이었지만 공덕역에서 내려 <을밀대>로 가는 길 내내 제발 줄이 짧기를 기도했다. 아직은 많은 사람이 냉면을 생각할 계절은 아니니깐 괜찮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을밀대>의 간판이 보이고 그 바로 밑을 확인했다. 살짝 봐도 골목으로 꺾여있는 줄이 눈에 들어왔다. "젠장"


<을밀대>가 을밀대 했다. 만삭이던 친구가 평양냉면이 먹고 싶다고 해 공덕역까지 데리고 왔는데 무거운 몸으로 줄까지 세워야 해 미안하고 머쓱했다. 매번 줄까지 서가면서 먹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눈빛에서 맛없으면 죽일 수도 있겠다는 느낌은 받았다. 반드시 맛있어야 했다. 종종걸음으로 걸어오느라 땀이 삐질, 줄이 길어서 삐질, 눈치를 받아서 삐질. 삐질거렸으니 내가 먹을 냉면은 먹어보지 않아도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열의 가장 끝으로 줄을 섰다. 왼쪽 창가에선 녹두전을 굽는 냄새가 바람결을 따라 솔솔 퍼졌고, 오른쪽에서는 제면기가 열일을 하고 있었다. 메밀 면들이 쉴 틈 없이 뽑혀 나오고 있는 것을 보니 입안에 군침이 돌았다. 이미 내 마음은 저 제면기 아래로 뽑히는 메밀면에 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힘들게 서 있는 친구에게 "그래도 오늘 줄 괜찮은 편이다. 요 정도면 설 만하지 않아?" 하는 소리를 했고, 친구는 "그래"라고 짧게 대답했다. 얼마간 그 줄에서 나오지 못하고 서 있다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주문하려다 옆자리 냉면을 보니 맛이 느껴져서 또 흥분됐다. 기다렸던 것도 까맣게 잊고 저 발끝에서부터 올라오는 행복함이 입꼬리에 전해져 웃음이 퍼졌다. 


"물냉면 얼음 있는 거 한 그릇이랑 거냉으로 한 그릇 주세요."



<을밀대>는 기본적으로 살얼음이 들어가 있다. 이것이 싫다면 '거냉'이라고 얼음을 뺀 냉면을 주문하면 되는데 그렇다고 따뜻한 건 아니니 오해 없이 취향껏 주문하면 된다. 친구는 얼음이 있는 냉면을, 나는 얼음이 없는 냉면을 주문했다. 다시 (실제로는 길지 않았겠지만 이미 마음이 메밀밭에 간 터라 체감상 긴) 기다림이 이어졌다. 종이 안에 소중하게 들어간 젓가락을 뽑아 드는데 무사의 칼처럼 기다랗다. 기다란 젓가락을 테이블에 탁탁 치니 마음가짐이 비장해진다. '내 오늘 <을밀대>의 냉면 한 그릇을 정복하겠어.'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냉면이 앞에 놓였다. 흥분됐지만 비장한 모습으로 기다란 젓가락을 냉면 속으로 가져갔다. 면의 중심을 찔러 넣어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휘익 휘익 저어 1차로 풀어줬다. 2차는 북쪽 방향을 사선으로 가지런히 찔러 넣어 아래로 당기며 풀어준다. 3차는 크게 면을 잡아 공중에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한다. 이 정도면 메밀면에게 적당히 기선제압을 했을 때다. 풀이 죽은 메밀면을 위쪽으로 싸잡아 놓고 일단 육수부터 맛본다. 꿀꺽하며 목구멍을 지나기 바로 직전! 그 순간! 육수의 향을 느껴본다. 환상적. 이제 정말 메밀면을 정복할 때이다. 유난히 긴 <을밀대>의 젓가락으로 면을 한 움큼 집어 입속으로 넣는다. 이미 각자의 냉면에 집중한 상태였지만 메밀면을 먹는 탓에 더 이상의 대화는 불가했다. 분명 <을밀대>의 냉면을 먹지 않고도 평양냉면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고 자신한 나였는데, 이상하게 오늘은 내가 정복당한 느낌이 들었다. 맛있어도 너무 맛있었다. 진한 고기 냄새가 싫었던 육수는 적절하게 배합되어 감칠맛을 풍부하게 가져다주었다. 두툼하고 거친 메밀면은 메밀의 향을 응축시킨 듯 기다란 면을 씹을 때마다 향이 폴폴 올라왔다. 이것이야말로 R&B! 이것이야말로 평양냉면의 리듬 앤 블루스가 아닐 수 없었다. 메밀의 맛과 고기의 향이 하나 되어 나를 황홀경에 빠트렸다. 그동안 <을밀대>를 제외했던 것이 미안할 정도로 맛있었다. 이날 먹은 <을밀대>의 평양냉면이 그해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여전히 <필동면옥>이 제일 맛있고 <평래옥>을 제일 자주 가지만, 정말 맛있었던 순간을 꼽아보라고 하면 세 손가락 안에 이날의 <을밀대>가 있다. 냉면을 다 먹고 나니 그 맛이 아쉬워 한 그릇을 더 먹고 싶었지만 다음을 기약했다 (먹고 나면 99% 드는 생각). 예전 같았으면 또 먹고 싶어지면 근처에 있는 <서북면옥>을 가곤 했을 텐데 이번은 아니었다. 정말 곧 <을밀대>를 다시 찾는다고 꼭꼭 약속했다.


그날 밤, 같이 갔던 친구는 새벽 1시에 메밀면이 너무 맛있었다며 나에게 연락을 했다. 덕분에 꾹 참고 있던 내가 못 참고 입속 어딘가에 남아있을 메밀 향을 찾아 짭짭댔다. 그 뒤로 일하고 있는 망원동에서 자전거를 타고 공덕으로 자주 퇴근하곤 한다. 한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30분가량을 밟으면 <을밀대>에 도착한다. 한겨울에도, 한여름에도 30분간을 쾌속으로 달리다 보면 땀이 흥건해진다. 냉면 한 그릇을 위해 땀이 흥건하도록 달린 스스로가 웃기기도 하고, 냉면 먹을 생각에 웃음을 참을 수 없기도 하고, 주문하고 기다리다 보면 맛있을 거 같아서 웃음이 터지고, 국물 한 입을 넘기면 벌써 맛있어서 또 미소가 떠나질 못하고, 기다란 젓가락이 역시나 멋있어서 뿌듯하고, 그 젓가락으로 면을 집어 올려 씹으면 퍼지는 메밀 향 때문에 눈이 감기고, 행복해서 비집고 나오는 웃음 사이로 메밀 향이 달아날까 다시 정신을 차리고. 그러다 10분이 흘러 빈 그릇이 되면 오늘 어떤 일이 있었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누구보다 내가 제일 행복하단 생각이 든다. 이런 행복감을 다시 느끼는 순간을 기대하며 내일을 살 힘을 얻기도 한다. 



평양냉면 한 그릇이 나에게 주는 행복이 이렇다. 평양냉면을 먹으러 가는 순간부터 먹고 나서 그리고 그 이후까지 행복감은 이어진다. 가끔은 이런 1차원적인 행복이 나의 내일을 이어 준다는 생각에 고맙기도 하다. 삶의 어떤 한 부분이 행복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준 자체도 좋지만, 행복하다는 감정을 느끼고 살아갈 수 있음도 행복하게 한다. 면발을 따라 이어지는 행복감이 나의 내일까지 연결해준다. 오는 길 흘렸던 땀방울만큼 콧노래가 나온다. 씩씩한 발걸음으로 공덕역을 향해간다. 콧노래 사이로 평양냉면의 여운이 느껴진다. 곧 지금의 행복감이 냉면처럼 소화되겠지만 다시 냉면을 마주하면 행복은 되살아나기 때문에 끄떡없다. 기다란 젓가락을 휘두르면 나를 덮친 어두움이 사라진다. 


행복함을 느끼고 그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게 어떤 것이든지. 그것이 세상을 구원할 수는 없어도 나 자신은 구원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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