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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재희 Oct 24. 2021

추억과 그리움의 집합소

〈평래옥〉 맛을 이기는 또 다른 힘.

<평래옥>은 호불호에 상관없이 제일 많이 갔던 곳이다. 평양냉면이 너무나도 싫었을 때부터 다녔던 곳이니 제일 익숙한 공간이기도 하다. 지나고 보니 이곳에서의 시간이 제법 소중해 오히려 어떤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어려워진다. 가만히 앉아 최초의 기억을 떠올려봤다.


할머니 손을 잡고 <평래옥>의 문턱을 넘었던 그 순간, 병원에 온 듯 차가운 느낌이 최초의 기억이다. 키가 할머니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했던 그때, 왠지 모를 무서움에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두리번거리던 기억이 꿈에서도 몇 번을 마주했다. 덕분에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꿈에서만 본 건지 불분명하지만 나는 이 장면을 평양냉면 그리고 <평래옥>에 대한 최초의 순간으로 기억하고 있다.


서울 중구에 있는 대형교회로 할머니는 6.25 피난을 왔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3세대 실향민이다. 같은 교회에 다니고 있는 내 또래들은 북한 사투리를 쓰는 조부모님이 계신 비슷한 모양의 가정에서 자랐고, 우리는 좋으나 싫으나 (대부분은 싫으나) 교회 앞에 있는 <평래옥>을 자주 갈 수밖에 없었다. 현재 <평래옥>은 중부경찰서 사거리에 있지만 지금의 자리로 이사 오기 전에는 현 남대문세무서 쪽에 있었다. 청계천 고가를 두고 중앙극장과 마주했다. 교회에서는 성인과 어린이의 예배 시간이 달라 주로 할머니가 초등학생인 나를 돌봤다. 예배가 끝나거나 드리기 전 할머니는 나의 손을 잡고 종종 <평래옥>을 찾았다. 냉면을 먹으러 가는 것도 있겠지만 그곳에 가면 할머니와 처지가 비슷한 권사님, 집사님, 장로님들이 계셨던 이유도 있었던 거 같다. 실제 기억 속에도 <평래옥>의 문을 열고 들어가면 냉면을 드시는 대부분이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었다. 교회 옆문을 통해 백병원을 마주하면 나는 직감적으로 오늘은 냉면집에 간다는 것을 알았다. 이렇게 맛없는 음식을 먹으러 가야 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차라리 *구라파 제과점에서 슈크림 빵을 먹거나 교회 식당에서 달걀을 원 없이 먹는 게 좋았다. 북한 사투리를 쓰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평래옥>의 북한에 온 듯한 느낌이나 차가운 냉면 모두 싫었던 거 같다. 


할머니는 늘 웃는 얼굴이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아, 물론 화가 날 때는 웃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 밝은 미소를 장착한 사람이었다. 할머니는 냉면을 드실 때도 미소가 떠나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때 할머니의 미소는 약간 슬픈 것도 같았다. 냉면이 맛있었던 건지 아니면 나처럼 맛이 없어 어쩔 수 없이 먹느라 슬픈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어쩌면 실향민이었던 할머니는 생전에 갈 수 없는 고향 땅이 그리웠던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유난히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고 그런 분들이 주일이면 <평래옥>에 모여 냉면을 먹었는데, 그때마다 고향 생각이 났던 것은 아니었을까. 할머니에게 <평래옥>은 할머니의 엄마가 겨울이면 만들어 주셨을 냉면 맛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할머니의 고향을 그리기엔 충분한 맛이었을 것이다. 


몇 해 전 할머니의 아들, 그러니깐 나의 아빠가 할머니 곁으로 떠났다. 내 곁에 있는 가족들은 모두 기댈 존재들이 아닌 챙겨야 할 존재들로 느껴져 너무 힘들었었다. 이렇게 힘들 때 할머니, 할아버지가 계셨다면 누구보다 큰 힘이 되어 주셨을 것이 분명했기에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할아버지가, 울고 싶을 때는 할머니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너무 힘들어 두 분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칠 때면 사진을 찾아보며 울었다. 그렇게라도 해야 견딜 수 있었고 위로가 됐다.


태어나면서부터 조부모님과 한집에서 함께 지냈기에 엄마만큼이나 할머니를 편하게 생각했다. 할머니는 남한으로 오면서부터 억척같이 지내왔다. 본인의 동생들과 남편, 자식들을 어떻게든 걱정 없이 편안하게 보살피기 위해 기쁨으로 희생의 역할을 해왔던 것이다. 할머니 덕분에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부족함 없이 원하는 것들을 모두 해가며 살아왔다. 할머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했지만, 나는 그것이 할머니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같던 할머니는 어느 날 모든 것을 잃어가는 병이 왔고 이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의 모습으로 10년을 지내다 나의 곁을 떠났다. 그토록 바라던 하나님 곁으로. 나는 할머니가 천국에 갔음을 의심치 않는다. 그리고 그런 할머니가 지금도 날 지켜주고 있음을 믿는다. 할머니의 임종 때 목사님이 마지막으로 할머니에게 한마디를 하라고 했다. 할머니를 좋아했지만 좋아해서 틱틱거렸던 순간이 떠올라 말문이 막히고 눈물샘이 터졌다. 꾹꾹 참고 할머니의 생기 없는 미소 위에 할머니 보기 부끄럽지 않게 잘 살 테니깐 계속 지켜봐 달라고 했다. 아빠가 할머니 곁으로 갔을 때도 같은 말을 했다. 그래서 나는, 부끄럽지 않게 잘 살아가야 한다. 그들과의 마지막 약속을 어기고 싶지 않다.


마음이 힘들 때마다 할머니가 사무치게 보고 싶어진다. 아빠가 떠나던 날도 그랬다. 상주로써의 역할을 마무리하고 며칠 뒤 <평래옥>을 찾았다. 8월의 매우 더운 여름이었지만, 왠지 그곳에 가면 할머니가 있을 것 같아 행복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내색하지 않지만 <평래옥>을 찾을 때면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가 보고 싶을 때도 <평래옥>을 간다. 할머니에게 <평래옥>이 고향을 떠올리는 순간이었다면, 나에겐 지금 곁에 계시지 않는 할머니를 그리는 순간이 된다. 교회 기도실에서 기도를 하고 <평래옥>에 가면 언제나 할머니의 웃는 얼굴이 나를 반긴다. 


언제나 미소를 짓던 할머니와 언제나 볼이 빵빵했던 나. (左 교회 주차장에서 / 右 집에서)


<평래옥>의 냉면에는 초록빛 얼갈이배추가 크게 올려져 있다. 억세 보이는 얼갈이배추가 조금은 부담스러워 보일 수 있겠지만 칙칙한 회색빛 평양냉면 위에서 혼자 싱그러운 분위기를 뿜어준다. 왠지 생기가 돋는 느낌이랄까. 이곳은 동치미 육수의 새큼함이 있어 냉면도 맛있지만, 복날이면 냉면보다 인기가 많은 '초계탕'도 유명하다. 여름 보양식으로 일품인 초계탕은 시원한 육수에 양상추를 비롯한 야채와 메밀면, 닭고기가 들어가 있다. 닭고기가 들어 있다는 이유로 초계탕은 아니다. 식초를 의미하는 '초'에 겨자의 평안도식 사투리인 '계'가 더해져 초계탕이라 불린다. 평양냉면이 입에 맞지 않는 사람들도 식초와 겨자가 섞여 새콤하게 톡 쏘고 알싸하게 찡한 초계탕은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 꼭 먹어보길 권한다. 


초계탕을 누구보다 맛있게 먹는 방법이 있다. 기본적으로 식초와 겨자가 들어간 만큼 잘 섞어 먹어야 한다. 주방에서 이미 섞여 나오기는 하지만 먹을 때마다 국자와 집게로 있는 힘껏 섞어 먹으면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균형 잡힌 초계탕을 먹을 수 있다. 식초와 겨자가 가라앉거나 양상추나 닭에 묻어 뭉쳐지지 않도록 힘껏 휘저어 먹는 것이 포인트다. 사람이 붐비지 않던 예전에는 서빙을 담당하신 분이 전문가의 손길로 섞어 주셨는데 요즘은 사람이 없을 때도 없고 시간도 없으신 거 같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전문가의 손길로 섞였을 때 정말 맛있었는데. 아쉽지만 이제는 각자가 잘 섞어서 맛있게 먹었으면 좋겠다. 


여기에 <평래옥>의 마스코트인 '닭무침'이 빠질 수 없다. 어디서도 만날 수 없는 닭무침은 기본 반찬으로 한 접시 나온다. 냉면만 먹는 걸 좋아해 다른 반찬은 잘 집어 먹지도 않는 나도 닭무침만큼은 사라지는 것을 아쉬워하며 야껴 먹는다. 닭무침 한입에 오물, 닭무침 한입에 꼬독, 닭무침 한입에 오물오물꼬독꼬독. 


메뉴에 닭무침이 있지만 한 번도 시켜본 적은 없다. 반찬으로 나오는 것보다 훨씬 더 맛있다고 하는데, 그럴 것이 꼬득하게 잘 건조되어 식감이 최고인 것들이 나오고, 찬으로 나오는 것은 그 외의 부위 특히 가슴살같이 조금 뻑뻑한 부위가 무쳐져 나오기 때문이다. 빨갛고 달큼하게 무쳐진 닭무침은 두툼한 이북식 만두에 올려 먹으면 금상첨화이다. 반찬에 간혹 꼬득한 부위도 섞여 있는데 식감이 놀랍도록 꼬득하다. 다음에는 꼭 한번 시켜 먹어 봐야지 하고 꼬독거리지만 올 때마다 냉면을 먹을 것인가 초계탕을 먹을 것인가로 저울질하는 것도 힘들어 닭무침까지는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다. 반찬으로 나오는 것을 아껴먹을 뿐이다. 5년 전쯤만 해도 리필이 가능했기에 기본 세 접시는 먹어왔는데 언제부턴가 리필이 사라져 처음과 끝을 잘 분배해 먹어야 한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구라파 제과점?

현 중부경찰서 사거리 앞 파리바게뜨 자리에 있던 빵집. 영락교회 교인들에겐 쌍용빌딩 앞 구라파 제과점으로 기억된다. 구라파 제과에서 파리바게뜨로 바뀌었지만 뭔가 의미는 일맥상통해 보여서 재밌다. 주일이면 간식으로 구라파 제과점의 슈크림 빵을 자주 먹었다. 친구들은 소보로를 좋아했지만 내 취향은 슈크림과 앙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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