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냉면이 되는 순간.
이제는 딱히 메뉴판을 보지 않아도 주문에 문제가 없는 정도가 됐다. 그도 그럴 것이 입맛에 맞는 집이 있으면 주야장천 그 집 위주로 찾으니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냉면 집에 들어가면 의자를 빼냄과 동시에 ‘나 평양냉면 좀 먹어봤습니다.’ 하는 말투로 물냉면 한 그릇을 주문한다. 식당에 따라 반 접시 만두나, 빈대떡을 시킬 때도 있다. 잠시 후 따뜻한 차와 찬을 주신다. 어떤 곳은 면을 삶은 면수를, 어떤 곳은 고기를 삶은 육수를 주신다. 개인적으로는 메밀 향이 잔잔하게 남아있는 면수를 좋아한다. 눈앞에 찬이 보이면 젓가락이 자동으로 찬을 향해가기 마련이지만 나는 꾹 참는다. 물론 면수도 마찬가지다. 뜨거운 여름에는 정말이지 목이 바싹바싹 타지만 이 시간을 어떻게든 견뎌본다. 견디겠다는 의지를 괜히 젓가락을 들고 식탁을 ‘툭 툭 툭’ 치고 젓가락을 다시 바로 잡는 것으로 다잡아 본다. 뭘 그렇게까지 견뎌내냐 하겠지만 다르다. 견딘 후 마시는 냉면의 육수는 천상의 맛이기 때문이다. 그 맛을 알면 참을 수밖에 없다.
주방이 보이는 곳이라면 최대한 주방과 가까운 혹은 잘 보이는 자리에 앉는다. 주방에서 분주히 면을 뽑고 만드는 것이 보여 좋다. 젓가락을 튕기고 입맛을 다시다 보면 곧 나의 냉면이 육수를 찰랑거리며 내 앞에 온다. 일단 차가움을 느끼고 싶어 그릇을 두 손으로 잡아본다. 먹지도 않았는데 입가에 행복이 번진다. 이미 흥분했지만 최대한 차분해지려 노력한다. 마음을 진정시키고 식탁만 치던 젓가락을 들어 냉면을 만나게 한다. 나의 냉면이 되기 위한 첫 번째 순간이다. 면과 고명을 휘이~휘이~ 저어 풀어놓는다. 그리고 (이 부분이 중요한데!!) 사랑하는 사람을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해 애틋함이 가득 담긴 듯한 손길로 얼굴을 감싸듯 냉면 그릇에 두 손으로 고이 감싼다. 이때 젓가락은 면이나 고명이 입속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막는다. 누군가는 면을 풀지 않고 순순한 육수를 먼저 맛보고 면을 풀어 다시 맛보는 것을 추천하지만 나는 메밀의 향이 살포시 배어 있는 육수를 좋아해 무조건 면을 풀고 국물을 흡입한다.
‘꿀꺽 꿀꺽 꿀꺽’
마실 때의 전략은 절대 혀의 앞쪽 부분으로 맛을 느끼려 하지 않는 것이다. 육수가 자연스럽게 식도로 향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혀의 역할이다. 맛은 식도와 식도에 가까운 안쪽 혀가 본다. 그러니까 ‘꿀꺽’에서 꺼를 지나 ‘ㄱ’ 부근에서 맛을 느낀다. 그 부분이 육수가 식도로 넘어가는 순간인데 이때! 두 눈을 감는다. ‘맙소사! 환상!’ 아직 면을 먹지도 않았지만 이미 게임 끝이다. 육수와 나, 나와 육수만이 이 우주에 있는 듯 내 모든 감각으로 육수의 감칠맛을 찾고 느낀다.
다시 진정해야 한다. 아직 면을 넘기지도 않았으니. 식도에 은은하게 메밀 향이 붙어있을 때야말로 면을 맛볼 진정한 시간이다. 개인적인 취향인데, 냉면을 먹을 때 고명을 함께 먹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계란 및 무절임 등등을 그릇 가장자리로 밀어 놓는다. 면을 먹기 직전 다시 휘이~ 휘이~ 저어 풀어준다. 그리고는 집을 수 있는 가장 가득 면을 집어 올린다. 메밀 면은 뚝뚝 잘 끊어져서 가위질이 필요 없다지만 ‘후루룩’ 소리를 내고 올라 온 면을 끊지 않고 입안에 몽땅 골인하고 싶어서 한 번 정도 면을 자른다. 물론 자르지 않고 먹을 때도 많지만, 자르든 자르지 않든 한번 집어 올린 것은 웬만해선 끊어먹지 않는다. 살짝 짤막해진 면이 입가를 치면서 입속으로 들어온다.
‘후루룩 후루룩’
어떤 말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입안에 가득 면을 넣고 ‘우물우물’ 씹는다. 질기지 않은, 씹기 좋은 적당한 굵기의 면이 입속에서 가닥가닥 모두 느껴진다. 가닥들이 씹을 때마다 메밀 향수를 '칙칙' 뿌려준다. 삼키기가 아쉬울 정도로 메밀 향이 퍼진다. 어쩜 이렇게 씹으면 씹을수록 향이 퍼지는지 끝이 없다. 아쉽지만 이제는 넘겨줘야 할 때가 도달하는데, 면은 끝까지 메밀 향을 뿜어내며 목젖에 하이파이브를 해주고 내려간다. 면이 내려가는 길이 느껴진다. 마치 이 메밀 향은 2017년 종영한 tvN의 드라마 <도깨비>에서 나온 메밀밭이 내 입안에서 펼쳐진 거 같다고 할 수 있다. 메밀밭 한가운데에 들어가 강아지처럼 뒹굴고 있는 느낌이다. 입속에서 메밀꽃이 만개했다.
이런 행동을 반복하며 냉면을 먹는다. 메밀밭에서 뒹굴다가 다시 육수를 입속에 머금고 육수 향을 감미롭게 찾아낸다. 이 감칠맛은 정녕 어디에서 온 것이기에 나를 이토록 미치게 만들었을까 싶어 웃음이 난다. 면을 흔들면서 행복해하는 내가 또 웃겨 고개를 도리도리 흔든다. 젓가락은 먹는 내내 그릇 안에서 떠날 줄 모른다. 젓가락이 식탁과 만나는 순간은 딱 처음, 주문하고 냉면을 기다릴 때뿐이다. 마지막 한 가닥 면까지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의 젓가락질이 끝나면 그릇엔 육수 몇 입과 고명만이 남는다. 그럼 다시 그릇을 감싼다. 마음은 변치도 않는지 그릇을 감싸는 손이 마치 처음의 순간처럼 듬뿍 담겨있는 애정과 이토록 사랑하는 냉면과 이젠 헤어져야 한다는 아쉬움이 공존한다. 남은 육수를 다시 ‘꿀꺽꿀꺽’ 한 방울도 남김없이 마신다. 식초와 겨자는 자유롭게 뿌려 먹으면 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냥 먹는 것을 좋아해 끝까지 사용하지 않는다.
이제는 정말 작별을 고해야 하지만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여전히 식도 입구에 살포시 남아있는 육수의 감칠맛과 메밀 향을 느끼며 텅 빈 입속을 몇 번 ‘꼴딱꼴딱’ 삼킨다. 이쯤 되면 이별이 다가왔음을 체념한 듯 얼굴에 아쉬움이 가득 묻어난다. 실제로도 정말 아쉽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없는 현실이 슬프지만, 맛있는 걸 오래 먹기 위해선 아쉬움도 감내해야 한다.
혼자 냉면을 먹을 땐 이렇게 먹는다. 생각보다 이 과정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체감상으로 3분이라 아쉬움이 짙었다. 그래서 실제로는 얼마나 빨리 먹는 건지 사진을 찍어 기록도 해봤다. 냉면이 나오고 빈 그릇이 되기까지 정확히 10분이었다. 그래도 10분은 함께했구나 싶으면서도 우리가 함께하는 시간이 10분뿐이니 아쉬울 수밖에 없었겠다 싶다.
10분의 속도감은 생각보다 빨랐다. 혼자 먹을 때는 속도감을 잘 몰랐는데 친구들과 먹으면 단거리 달리기를 하듯 먹느라 다 먹고 나면 나도 친구도 놀라곤 한다. 그리고 친구의 냉면은 위험해진다. 아쉬움이 짙은 내 젓가락이 참지 못하고 친구의 냉면을 탐하고 이내 범하기 때문이다.
냉면을 먹는 시간은 10분뿐이지만 10분의 여운은 아주 오래간다. 냉면을 먹고 나면 그날 밤 ‘평양냉면’이 계속 생각나기 때문이다. 한밤중에 메밀 향이, 혹은 육수의 감칠맛이 올라오는데 그럼 또 GAME OVER. 다시 중독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게 된다. 내일 또 먹자고 스스로 위안을 주어야만 잠을 잘 수 있다. 그러다 보면 일주일에 몇 번을 냉면집에 들락거린다.
내일은 또 어떤 냉면이 나를 유혹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