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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재희 Oct 24. 2021

자줏빛 육수에 냉면을 말아먹고

'평양냉면'이 알고 싶다.

냉면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시간을 보내다 정신을 차리니 궁금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과연 인간은 언제부터 냉면을 먹게 됐는지부터 정확히 평양냉면은 어떤 음식인지 알고 싶어졌다. 이게 과연 정신을 차린 게 맞는지 모르겠지만 오로지 평양냉면의 기원을 알고 싶다는 마음으로 도서관에 갔다. 도서 검색란에 ‘평양냉면’을 적고 조금이라도 관련된 책이 있다면 다 뒤져 읽었다. 교과서 내용은 그렇게도 외워지지 않더니 냉면에 관해서는 눈으로 읽는 동시에 절로 암기가 됐다(참고로 본인 전화번호 외우는 데도 한참 걸렸던 암기 바보). 좋아하는 건 외우려 하지 않아도 외워진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던 시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에 대해 이것저것 알고 싶은 그런 마음. 그런 마음이 사람이 아니라 평양냉면에 닿았을 뿐이지 하는 행동은 똑같았다. 그렇게 도서관을 들락거리며 찾아낸 평양냉면에 대한 소중한 정보들은 여전히 나의 머리에 차곡차곡 쌓여있다. 물론 지금은 사랑에 빠졌던 처음의 열정과 같지 않지만 내 사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이 정보들이 언제 내 머리에서 비워질지 그렇지 않을지 아직은 나도 모르겠다.


그래서 냉면의 기원은 어디인가.




냉면의 시작


한국에 ‘냉면’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자줏빛 육수에 냉면을 말아먹고」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였다. 이 시는 <계곡집>이라는 문집을 통해 발표되었고 쓴 이는 조선 중기의 ‘장유’라는 문인이었다.  물론 여기에 실린 ‘냉면’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의 ‘평양냉면’ 인지는 정확하지가 않다. ‘냉면’은 한자 풀이 그대로 ‘차가운 면’으로 동북아시아 쪽에 통용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 후기, 조선과 중국의 사물이나 생활 방식에 관해 쓴 ‘이유원’의 <임하필기>에서는 순조가 한가로운 밤이면 신하들을 불러 함께 달구경을 하곤  하시다가 “너희들과 함께 냉면을 먹고 싶다.” 하신 일화도 담겨있다.  고종 역시 궁 밖에서 냉면을 사다가 먹은 이야기도 있다. 왕이 밖에서 야식으로 사다 먹을 정도였으면 이미 이 시기에 종로 일대에는 ‘냉면’ 집들이 어느 정도 있었을 것으로도 보이고 ‘테이크아웃’ 도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순조 이후, ‘냉면’은 더 이상 고위계층만  즐기는 음식이 아니었던 것 같다. 왕실과 관청에 그릇을 납품하던 ‘지규식’의 <하재일기>에 ‘냉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가격은 얼마였고 날이 더워지면 보름에 3번은 사 먹었다는 기록도 있다. 이 글이 쓰인 1890년대에 ‘냉면’은 모든 이들에게 친숙한 음식이 되었던 것 같다. 동국세시기(1849)에 ‘돼지고기에 무김치와 배추김치를 섞어 메밀국수를 말아먹는 것을 냉면이라 한다. 관서 지방의 냉면이 가장 맛있다.’라고 적혀 있다. 이때 관서 지방은 평안도 지역이며 기록된 ‘냉면’이 지금 우리가 아는 평안도식 냉면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세시풍속 사전 겨울 편(2006)에 보면 본격적으로 서울에 냉면집이 등장한 것은 1920년대였다고 한다. 이유에는 제빙기의 보급이 가장 컸다. 냉면을 파는 매장마다 제빙기가 있음으로 인해 사시사철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보고 있다. 여기에 ‘아지노모토’라는 조미료가 큰 히트를 하면서 고기 육수의 맛을 대신할 수 있었다. 재료의 신선도 문제로 겨울과 동일한 동치미 맛을 여름에는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고기 육수를 냈는데, 사정상 진한 고기 육수를 내기 어려운 곳은 조미료로 대신 맛을 낸 육수로 판매했다고 한다. 맛을 내기도 편했지만 비법이라고 할 정도로 '아지노모토'의 맛이 좋았던 걸로 보인다.


이러한 이유가 모여 더이상 냉면이 왕만 먹는 음식도 겨울에만 먹는 음식도 아닌, 언제든 누구나 자주 접하고 즐길 수 있게 된 계기가 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이런 시간을 거쳐 나에게까지 왔다고 생각하니 왠지 감개가 무량해졌다. 냉면의 역사에 한 부분이 된 것 같기도 해서 뭉클해지기까지 했다.


‘냉면’은 많은 사람이 여름 음식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안도에서는 겨울에 먹는 음식이었지만, 서울에서는 여름에 먹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평양에서 냉면은 밤이 긴 겨울에 야식으로 먹는 음식이었다. 평안도는 지역적으로 무가 맛있었고, 맑은 물이 흘러서 동치미를 담그면 국물 맛이 유난히 좋았다고 한다. 충분한 음식을 구하기 어려운 겨울의 긴 밤, 동치미 국물에 메밀국수를 말아 출출함을 가시게 한 것이 평양냉면의 시작인 것이다. 한겨울 따뜻한 바닥에 앉아, 맛있고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제철 메밀로 만든 국수라니 글씨만 볼 뿐인데도 군침이 고인다. 


이렇게 평안도에서는 겨울 음식이었던 것이 서울에 진출하고 보급되면서 여름 음식으로 인식됐다. 지금은 평양보다 서울에 마니아가 더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나부터도 서울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실제로 수도권을 벗어나면 평양냉면을 먹기가 어려워진다. 이쯤 되면 평양냉면이 아니라 서울냉면이라 불러도 무방할 듯싶다.

예전에는 매장에 메밀면을 의미하는 깃발이 달림으로 평양냉면의 개시를 알리곤 했다.



육수와 면


‘평양냉면’은 크게 육수와 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육수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매장에 들어가 메뉴를 보면 어떤 재료를 기초로 하는지 대충은 알 수 있다. ‘편육’이 있다면 소고기를 사용한다는 뜻이고, ‘수육’이 있다면 돼지고기를 베이스로 한다는 것이다. 물론 둘 다 있는 집도 많은데 그건 두 종류의 고기를 모두 사용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집이 다 고기 육수만 내는 것은 아니니 말 그대로 대-충 알 수 있다. 


‘편육’이 있어 소고기를 베이스로 육수를 사용한다면 깔끔하고 담백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돼지고기를 사용할 경우에는 깊고 진하다. 또 고기의 종류는 같아도 국물의 상태가 어떤 곳은 걸레 빤 물 같이 투명에 가까운 육수가 나오고, 어떤 곳은 진한 국물이 나오기도 한다. 이건 육수를 낼 때 뼈와 함께 우리면 진한 색의 육수를 만날 수 있고, 살코기만 사용할 경우에는 맑은 국물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물론 간장을 살짝 첨가해 색을 진하게 내기도 한다. 매장별 차이가 있기에 정확하게 딱 무엇이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대체적으로는 소고기와 돼지고기 육수를 베이스로 두고, 뼈까지 통째로 삶는가 혹은 살코기만 사용함으로 육수 맛에 차별을 둔다고 한다. 원래 평안도 지방이 소의 품질도 좋아서 소고기를 기본 육수로 사용해 좋은 맛을 내기도 했고, 꿩고기로도 육수를 냈는데 요즘은 꿩이 귀해서 육수로 사용하는 곳은 찾기 어렵다. 고기 육수에 동치미를 추가로 사용하는 매장들도 있다. 동치미가 들어간 집들 특유의 시원함이 남달라서 좋아한다.


이번에는 면이다. 


감자가 유명했던 함경도 지역에서는 감자전분을 사용해 탄력이 좋은 면을 만들었고 그게 ‘함흥냉면’의 시작이 되었다. 그에 반면 ‘평양냉면’은 감자전분이 아닌 메밀로 면을 뽑았다. ‘냉면’이라고 불리기엔 툭툭 끊어지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매력으로, 누군가는 불호로 다가선다. 실제로 주변에 쉽게 끊어지는 면의 식감을 낯설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냉면’이라고 하면 끊어질 듯 말 듯 한 면이 매력이라 말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사실 한국은 밀을 재배하기 좋은 기후나 환경은 아니라고 한다. 밀 농사가 쉬운 곳에서는 빵이나 파스타 같은 밀가루를 이용한 음식이 발달하지만 한국은 그렇지 않았다. 물론 일제강점기 이후 삼백 산업의 일환으로 하얀 밀가루를 공급받을 수 있게 됐고, 그 뒤로는 쉽게 접할 수 있는 재료가 됐다. 


그럼 한국에서 밀을 대신 할 수 있는 작물이 무엇이었을까. 바로 그게 메밀이었다. 메밀은 맛도 좋고 키우기도 좋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 있었다. 바로 찰기가 없다는 것. 찰기가 없으니 면으로 뽑기가 매우 난해했을 거다. 날이 더우면 더 잘 풀어지니 차라리 겨울에 먹기 용이했을 것이다. 이런 메밀의 특성 때문에 예전도 지금도 수타로는 면을 뽑을 수가 없다. 찰기 없는 면을 뽑기 위해서는 꼭 틀이 필요했는데 그 틀이 지금의 제면기다. 요즘도 자가제면이라고 해서 매장에 제면기를 두고 주문과 동시에 면을 뽑아준다. 메밀의 성질에 따라 차가운 겨울에는 반죽에 메밀 함량을 높이고, 더운 여름에는 전분 함량을 높이는데 이 비율을 맞추는 것이 요리사의 능력이라고 한다. 비율이 조금이라도 달라지면 맛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먹는 법


음식에 법이 어디 있을까 싶지만 유독 평양냉면은 먹는 방법에 대해 말이 많다. 덕분에 ‘면스플레인’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하기까지 했다. 나 역시 제일 좋아하는 곳이 어디냐는 질문과 더불어 어떻게 먹냐는 물음을 가장 많이 받아봤다. 처음에는 면스플레인이 말하는 ‘순수한 냉면’ 그 자체로 먹어야 답인 줄 알았다. 친구들이 겨자와 식초를 뿌릴 때마다 탄식을 금치 못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은지 꽤 됐다.


어떻게 먹어도 맛있게만 먹으면 그만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다음 글에서 ‘내가 맛있게 먹는 법’을 소개할 테지만 평양냉면을 먹는 정답은 없다고 생각한다. ‘순수’를 찾던 사람들이 보고 놀랐을  남북정상회담 속 옥류관의 평양냉면. 그 모습이 우리가 아는 평양냉면과 달랐기 때문이다. 붉은빛을 띠는 것도 모자라 식초를 뿌리고 가위로 성큼 잘라먹는 모습은 면스플레인들에게 당혹함을 건네주었지만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즐거웠다. 


그래, 모든 것은 본인 기호에 맞게 맛있게 먹는 거지.





알아두면 쓸 데 있는 신비한 냉면 사전


거냉: 육수가 미지근한 것을 말한다. 얼음이 없는 상태. 

민자: 꾸미용 고기를 빼고 면으로 대체하는 것. 오직 면과 육수만 있다.

엎어말이: 사리 추가.

계란: 위에 부담이 될 메밀의 찬 성분을 계란이 보호해준다. 그래서 나중이 아니라 먼저 먹는 것을 권장한다. 계란이 육수를 흐린다고 생각해 지단으로 나오는 집들도 있고, 노른자를 육수에 풀어 먹는 분들도 있다. 역시 냉면은 기호에 맞게.

식초: 고기국물의 누린내를 잡아줄 수 있다.

겨자: 차가운 냉면의 냉기를 따뜻한 성분의 겨자가 중화시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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