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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재희 Oct 24. 2021

계절이 변하는 모습

〈서북면옥〉 계절은 매일 변해도 우리는 그 모습 그대로.

서울 광진구에 살고 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어린이대공원 후문 앞, 아차산 자락에 살고 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사와 초, 중, 고를 지나 지금까지 광진구에 살고 있다. 나의 가족은 어쩌다 연고지도 없던 광진구에 정학하게 된 것이었을까. 태어난 곳은 광진구가 아니지만 이젠 나의 고향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광진구에 살고 있는 게 좋고 자부심도 있다. 뒤로는 아차산이, 옆으로는 한강이 흐른다. 마음만 먹으면 산책하기 좋은 곳들도 무수히 많다. 5분만 걸으면 뉴욕의 센트럴파크 못지않은 어린이대공원도 있다. 


거기에 3대가 덕을 쌓았는지 집 앞에는 평양냉면 가게가 있다. 을지로, 충무로 쪽에 밀집되어 있어 광진구에도 평양냉면을 파는 곳이 있다는 사실이 조금 생뚱맞아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광진구에 살고 있는 평양냉면 애호가에게는 이보다 희소식이 없다. 애호가는 바로 나. 5호선 아차산역을 시작으로 2호선 구의역까지 이어지는 직선거리 그 중간 지점에 <서북면옥>이 자리하고 있다. 일주일에 최소 세 번은 그 앞을 지나쳐야 할 정도로 자주 다니는 길에 위치하고 있다. 



<서북면옥>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됐을 땐 17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등하굣길 중간엔 <서북면옥>이 있었다. 더군다나 그 앞에서는 무조건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기 때문에 <서북면옥>의 동태를 살필 수밖에 없었다. 반짝이는 아침의 햇살을 받은 조용한 <서북면옥>을 지나며 학교로 달려갔고, 야간 자율학습이 끝나고 터덜터덜 집에 가는 길엔 네온사인을 반짝이며 어두운 거리에 존재감을 드러냈다. 가로수 나무들처럼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의 등하교를 지켜봐 준 <서북면옥>이다. 이건 비단 나만의 추억은 아니다. 함께 학창 시절을 보낸 친구들을 만나 평양냉면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는 늘 <서북면옥>의 이야기를 나눈다. 떡볶이나 순대꼬치가 제일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했던 고등학생들에게 평양냉면은 안중 오브 아웃이었겠지만 늘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서북면옥>의 존재를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야 거기 <서북면옥>. 여름만 되면 그 앞에 사람 겁나 많아서 진짜 냉면 맛있는 줄 알고 갔다가 겁나 맛없어서 놀랐잖아. 그거 평양냉면이지?" 보통은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된다. 깔깔깔 웃으며 <서북면옥>이 겁나게 맛이 없었다고 근데 왜 이렇게 여름만 되면 사람들이 많아지는지 알 수가 없다고, 그렇게 나누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여고생으로 돌아가 까르르거린다. 


나무 그늘 밑으로 자꾸 몸을 숨기고 싶은 계절이 되면 <서북면옥> 앞, 좁은 길은 사람들로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다. 매일을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변한 계절을 만나게 된다. 어느 날 문득 하늘이 높아졌음을 바라볼 때 가을이 왔음을 알게 되고, 앙상했던 가지마다 귀여운 새순이 돋아나면 마음이 뭉클해지면서 새로운 다짐을 해본다. 이렇게 매번 계절의 흐름을 문득 알아채곤 한다. 알게 모르게 변하는 자연의 변화에 사람들은 반응하고, 나는 사람들의 반응을 바라보며 계절의 흐름을 다시 깨닫게 된다. 학창 시절 매일 두 번씩 오가던 <서북면옥>을 보면서 말이다.


비교적 다른 날보다 수업이 빨리 끝나던 수요일과 3교시뿐이던 토요일(나 때는 말이야, 토요일에도 학교를 갔다) 집에 가는 길이면 <서북면옥>의 분위기를 더 잘 파악할 수 있었다. 삼삼오오 모이기 시작하면 코트를 벗을 때가 됐음을, 아직 덥지도 않은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싶을 때는 어린이대공원에 벚꽃이 만개했음을 암묵적으로 알 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야 어린이대공원 주변으로 음식점이 어디에 있는지 잘 알지만 이따금씩 놀러 오는 사람들은 어린이대공원 구의문 주차장 옆 <서북면옥>을 많이들 찾았다. "헉, 냉면집 앞에 사람 왜 이렇게 많아?" "벚꽃 다 폈나 봐. 우리도 야자 째고 벚꽃 보러 가자." 


구의역을 가기 위해 마을버스 03번에 올라타고 한숨을 돌리면 <서북면옥>앞에서 신호를 받느라 잠깐 기다린다. <서북면옥>이 잘 지내고 있나 창밖을 내다보면 옷차림이 가벼워졌는지도 망각하고 냉면집 앞에 많은 사람들을 보고 놀라곤 한다. 번호표를 들고 그늘을 찾아 옹기종기 모여있는 사람들을 보니 슬그머니 냉면 맛이 입에 돌기 시작한다. 정말 여름이 오기 시작하나 보다. 곧 나도 저 무리들 가운데 서성이고 있겠구나 싶었다. 정말 여름이 오기 시작하나 보다. 그러고 보니 햇빛에서 여름의 후끈함이 느껴진다. 


친구와 건대입구에서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은 주로 자전거를 이용한다. 건국대학교를 가로질러 어린이회관을 지나 <서북면옥>앞을 꼭 지나간다. 오픈을 알리는 네온사인이 반짝하고 보이면 자전거 속도를 줄여 매장 안을 들여다본다. 밤이 되어야만 밝은 실내가 잘 보이는 시트지를 붙여놨기 때문에 저절로 시선이 움직인다. 여름에는 낮이나 밤이나 늘 북적이던 냉면집이 언젠가부터 밤에는 손님이 확연히 줄었다. 테이블을 지키고 있는 손님이 두 팀 정도 있으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는지 몰라도 걱정스러운 마음까지 든다.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서북면옥>이 망하면 안 되는데 싶어서이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꼭 그러지 않으리라는 일도 없으니까 말이다. '왜 손님이 없지? 내가 가야겠네.' 하는 마음으로 다시 자전거 바퀴를 구르면 플라타너스 나뭇잎들이 자전거 바퀴에 닿아 바스락거린다. '아 가을이 왔구나. 그래서 손님이 줄었구나' 역시 왠지 모르겠지만 안도의 미소를 띠며 신나게 집으로 간다.


롱 패딩에 단단히 무장을 하고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커피를 마시러 스타벅스로 향한다. 집에서 제일 가까운 스타벅스는 <서북면옥> 근처에 있는 구의 DT점 하나뿐이었기에 진한 커피가 먹고 싶을 때면, 집에 있다가도 걸어 나오곤 했다.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평양냉면에 관한 글을 많이 썼는데, 쓰다 보면 냉면이 먹고 싶어 안달 나곤 했다. 누구를 위해 쓰는 것인지 몰라도 글을 한 편 쓸 때마다 책을 한 번 입고할 때마다 평양냉면을 먹었다. 안달 난 나를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스타벅스까지 가서 글을 쓴 이유는 진한 커피도 한몫했겠지만, 냉면을 먹기 좋은 핑계이기도 했던 것이다. 안달 난 순간 조금만 가면 <서북면옥>이 있으니 힘들지 않게 냉면을 먹을 수 있었다. 잠깐만 걸어도 차가워지는 코를 훌쩍이며 <서북면옥>으로 들어간다. <서북면옥>은 좌식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에 앉으면 얼었던 몸이 사르르 녹는다. 겨울이 왔다. 정말 겨울이다. 



뿌연 육수에 면이 소복하게 올라가 있는 <서북면옥>의 냉면. 면을 흔들고 그릇을 들어 육수를 들이켜다 보면 벽면에 붙어있는 한문 글귀가 보인다. '大味必淡(대미필담)' 정말 좋은 맛이란 반드시 담백한 것. 따뜻한 방에 앉아 차가운 육수를 들이키며 글귀를 본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어진다. 면을 자르고 싶어 가위를 부탁드리면 면이 잘 끊어져서 안 잘라 드시는 게 맛있다고 권해준다. 그래도 잘라달라고 하면 마다하지 않으시지만 권하는 대로 먹어 보는 것을 나도 추천한다. 


사계절을 맞이할 때마다 나에겐 늘 <서북면옥>이 있었다. 그 앞을 매일 지나다니다 보니 20년이 흘러버렸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서북면옥>. 그 앞에서 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느낄 때마다 문지방을 넘었다. 그사이 시간이 20년이나 지났다. 까르르 거리던 학창 시절에서 잠깐 사이 현재로 돌아왔다. 친구들과 언제 이렇게 시간이 지났을까 하며 지난 시간들을 잘 추억하며 앞으로의 시간들도 함께 잘 지내보자고 토닥인다. 계절은 쉴 틈 없이 변하지만 <서북면옥>은 변하지 않듯, 우리의 몸은 세월을 따라 매일 변하고 있지만 마음만은 학창 시절 순수했던 그때처럼 변치 말자고. 다시 까르르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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