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원면옥〉 돈으로 정의되지 않는 행복.
일을 그만둔 지 벌써 6년 차가 되었다. 20대를 돌이켜 보면 지금 나의 모습이 그때 그린 모습이었을까 생각한다. 지난 일에 큰 미련을 남기지 않으려고 오늘, 지금에 최선을 다하자며 살고 있으나 가끔은 지난 시간이 떠올려지는 걸 어쩔 수는 없다. 친구들처럼 사무실에 앉아 이름 뒤에 대리를 달고, 과장을 달며 익숙해진 일들 속에서도 매일 터지는 문제를 새롭게 메꾸며 살아가고 있을 줄 알았던 나는, 퇴사 6년 차다.
일을 그만두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는 혼돈의 카오스, 스물아홉 살이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 진짜 늦은 거라지만 뭔가 이룬 것이 없어서 내려놓는 게 아쉽지 않을 지금이라도 그만두자고 결심했다. 한동안은 모아놓은 돈으로 일을 하느라 하지 못했던 것들을 다 누려봤다. 이래서 건물주가 되라고 했나 싶을 정도로 돈도 있고, 시간도 있는 부자였다. 신나게 놀다 보니 점점 잔고가 0을 향해 달렸다. 시간은 여전히 부자이고 해보고 싶던 일을 하고 있음에행복하지만, 돈이 없는 삶은 불안했다. 행복을 얻기 위해 꼭 돈이 필요하진 않겠지만 행복한 일을 위해서 돈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것도 일을 그만두고서야 알았다. 그래서 직장생활이 그립냐면, 솔직히 잘 모르겠다. 지금도 이따금 마음이 어지러운 날에는 취업 정보 사이트를 들어가 보기도 한다. 돈과 행복에 관계를 알 수 없었던 6년 전 그때 나는, 4호선 회현역으로 출근했다.
마로니에 공원이 있는 혜화역이 아니라 남대문 시장이 있는 회현역이다. 남대문 시장과는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될 정도로 사무실과 가까이 있었다. 새벽부터 일을 하는 상인들이 많아 아침으로 먹을 요깃거리가 많았다. 덕분에 회현역 지하부터 고소하고 맛있는 냄새가 폴폴 풍기는 바람에 출근 발목부터 잡혔다. 내국인, 외국인 할 거 없이 많은 사람이 붐비기 시작하는 오후에는 본격적으로 포장마차의 불이 켜지고 다시 맛있는 냄새를 풍기기 시작했다. 시장을 가로지르면 이름부터 군침도는 '북창동 먹자거리'가 나오니 아침, 밤으로 배가 고플 일도 없었다. 그 결과물들을 육체에 차곡차곡 쌓아 진정 내 것이 되기도 했다. 아침 요깃거리로 제일 좋아하는 메뉴는 '만두'였다. 평양냉면을 이야기하면서 만두라니. 하지만 아침부터 냉면을 먹을 수는 (솔직히 있지만) 없으니 매운맛 만두를 한 알 사 먹으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혹은 즉석에서 잘라주는 꼬마김밥이나 옛날 도넛을 사 먹기도 했다. 저녁에는 줄 서서 먹는 야채 호떡 대열에 슬쩍 들어가기도 했고, 지금은 방송인 이영자 님이 먹고 유명해진 화덕 호떡을 먹으러 가거나 맞은편에 있는 굵은 김밥을 사면서 행복해했다. 맛있는 것들을 하나씩 사 먹는 것이 출, 퇴근에 누릴 수 있는 행복 포인트였다. 출근하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대부분 스트레스받는 일일 테니 맛있는 요깃거리들을 먹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침과 저녁은 이야기하고는 왜 직장인이 제일 사랑하는 점심은 뺐는지 척하면 딱이다. 이제 냉면을 이야기할 차례. 주인공의 등장을 위해 만두와 호떡을 깔아줬다.
한여름이 되면 사무실에선 한겨울의 냉기가 돈다. 누구도 조절하지 못하는 중앙냉방 시스템 덕에 시원하다 못해 추운 에어컨 바람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문제가 없는 날도 많겠지만 이놈의 문제는 터지면 또 터지면서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모든 멘탈을 함께 터뜨린다. 창문 너머로 나뭇잎의 푸른빛이 바람에 흔들리고 노란빛을 가득 품은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지만 사무실은 냉혹하다. 살갗은 추워서 긴 옷을 입어야 하지만 마음은 한증막처럼 답답해진다. 당장 한증막을 탈출하고 싶은데 시계는 아직 12시를 가리키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기를 마음을 다해 기도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어차피 시간은 흐르게 되어있다'를 되뇐다. 한 바퀴를 돌아야 하는 분침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고 행복한 순간을 떠올린다. 그럴 때마다 '뿅!'하고 등장하는 평양냉면 한 그릇. 분침을 따라 평양냉면이 점점 커지고 내 마음은 초침처럼 움직거린다. 그럼 그날은 평양냉면을 먹는 날이 되는 거다. 드디어 시침, 분침, 초침이 모두 상봉을 하고 누군가 "점심 먹으러 갑시다"하는 소리가 들리면 누구보다 빨리 일어나 "전 오늘 약속이 있어서요"하고 부리나케 나간다. 나에게 주어진 1시간의 달콤한 점심시간, 평양냉면과의 약속. 신나는 발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 남대문 시장으로 넘어간다.
길을 건넌 후 남대문 시장 길로 진입하면 수많은 사람의 머리들이 보인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사람들을 해치며 첫 번째 골목에서 우회전한다 (마음도 잘 먹지). 옷가지들을 판매하는 가게들을 둘러보며 몇 걸음 옮기자 오른쪽으로 <부원면옥>의 계단이 보인다. 옷가지들 사이에 키보다 조금 작은 입간판이 덩그러니 서 있고 거기서 다시 오른쪽으로 몸을 틀면 돼지기름 냄새가 고소하게 풍기는 천국의 계단이 나를 반긴다. 높이가 긴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갈 때마다 돼지기름으로 부치는 빈대떡 냄새가 진해진다. 이러니 빈대떡을 안 시킬 수가 없다. 지글거리는 빈대떡에 눈길을 길게 주고 <부원면옥>에 들어가 앉는다.
물냉면과 빈대떡을 시켜놓고 주방을 내내 응시하다 고개를 돌리면 어르신들이 한 두 분 계신다. 유난히 혼자 오신 어르신들이 많다. 냉면집들이 보통 어른들이 많긴 하지만 크지 않는 <부원면옥>을 채우고 있는 손님들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머리가 희끗희끗한 어른들이다. 평일 점심시간이라 그런 것도 있겠고 당시엔 평양냉면이 유행이던 때도 아니었으니 그랬겠지만 <부원면옥>에 혼자 앉아있는 내 존재가 특별해 보일 정도였다. 둘러보다 보니 냉면이 금방 나에게 도달했다. <부원면옥>의 냉면은 약간 도톰하고 매끄러운 메밀면에, 쌀을 한 번 씻었을 때 생기는 물처럼 뽀얀 육수다. 뽀얀 육수는 예전에 꿩을 주로 사용하던 것을 소로 바꿔 사골 중심으로 우린 결과물이다. 고명으로는 물기를 쪽 뺀 오이가 소복하게 올려져 있는데 다른 고명들은 좋아하지 않지만, 물기 없는 오이의 오독거림은 좋아하는 편이다. 다른 곳들에 비해 미끈한 맛이 있는데, 면이 유독 매끈하기도 하고 약간의 달달함이 미끈한 맛을 내는 거 같다. 시원하게 냉면을 들이켜니 답답했던 오전 업무의 모든 것이 쑤-욱하고 내려간다. 냉면에 스트레스가 달라붙어 미끄러지듯 쑥 내려가니 다시 행복함이 채워진다. 한여름 평일, 벌건 대낮에 푸른빛 남산에 오를 사람도 없겠지만, 제아무리 푸른 나뭇잎이 살랑거려도 <부원면옥>에서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냉면을 먹을 수 있는 내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보다 100배는 더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생긴다.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겠지만 행복한 점심시간을 만끽하고 돌아온 사무실에서 다시 오후의 업무를 시작한다. 퇴근까지의 시간은 한참이나 남았고 또 어떤 시련이 닥쳐올지 모르지만 괜찮다. 평양냉면 한 그릇으로 내 마음과 멘탈이 깨끗해졌으니 무엇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각오가 생긴다.
나의 해방구였던 <부원면옥>.
이것이 그리 짧지 않은 시간 한 군데에서 일을 지속할 수 있었던 힘이다. 만약 <부원면옥>이 없었더라면 답답한 마음을 풀어낼 길이 없었을 거다. 물론, 살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닌 먹기 위해 사는 나는 어떻게든 입이 행복할 무언가를 찾아냈겠지만 말이다.
일을 그만두고 힘들었던 부분 중의 하나는 마음껏 냉면을 먹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웬만하면 끼니를 집에서 해결하고 되도록 외출을 삼가는 삶을 살았는데 그럴수록 냉면의 맛이 고팠다. 냉면의 맛이 단전에서부터 올라와 혀끝에 도달할 때면 마음속에 바를 정(正)을 곧게 그려가며 두 글자가 완성될 때까지 참아냈다. 한 획 한 획 바르게 그어 10번이 되면 누워있다가도 벌떡 일어나 냉면집으로 향했다. 급할땐 집 앞에 있는 <서북면옥>을 찾았고, 큰맘을 먹은 날에는 <부원면옥>까지도 갔다. 예전과 달리 입구부터 풍기는 고소한 돼지기름 냄새를 모른 체하며 매장에 들어갔다. 냉면을 한 그릇 시키고 통장 잔액을 들여다보고는 빈대떡을 시킬까 말까를 고민하다 이내 포기하기도 했다. 냉면을 먹으러 여기까지 온 것 자체가 이미 오늘의 사치였다는 것을 잔액이 말해줬다. 24시간을 마음껏 누릴 수 있는 시간 부자는, 숨 쉬는 것을 제외하면 생각보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냉면 그릇 위에서 깨달아 버렸다. 만원이 안되는 냉면을 10번이나 참아내고 먹는 걸 자제력이 강한 사람이라고 여겼던 것이 스스로를 위한 위안이었음을 느껴 약간 슬펐다. 또 약간 비참하기도 했다. 그래도 냉면은 내 얼굴 밑에 놓였고 먹었다. 슬픈 나의 마음도 모르고 냉면은 여전히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냉면을 또 10번을 참아야 한다니 매일 먹어도 통장 잔액 한 번을 들여다보지 않던 그때가 그리워질 지경이었다.
'꿀꺽'삼키던 냉면 육수를 '홀짝'거리며 아껴먹었다. 먹을 때마다 맛있는 냉면이 좋으면서도 슬프고 비참한 나를 약올린는 듯 맛있어서 미웠다. 통장 잔액은 바닥이지만 냉면은 먹고 싶어.
아무렇지 않은 척 계산을 하고 <부원면옥>을 나와 명동까지 걸었다. 다시 명동에서 종로까지 걸었고 종로에서 친구가 결제한 뒤 언제든 타라고 공유한 *따릉이를 탔다. 사대문 안에서만 시범적으로 운영한 탓에 따릉이는 어린이대공원 정문에서 멈춰야 했다. 다시 <서북면옥>앞을 걸어 집으로 왔다. 냉면이 다 소화되는 느낌이 들었지만 이렇게라도 냉면을 즐기고 왔음에 행복했다. 그래도 <부원면옥> 냉면 먹을 돈은 통장에 있었고, 좋은 친구를 둬서 따릉이를 맘껏 탈 수 있었던 것과 1시간 반이 걸려도 따릉이를 탈 수 있는 곳에 살고 있음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시간 부자 6년 차를 맞이했다.
지금은 사정이 조금 나아져서 바를 정(正) 하나를 다 채우지 않고도 냉면을 먹는다. 그렇다고 해서 풍족해 진 것은 아니다. 여전히 불안과 비참함이 찾아 오지만, 이런 나의 가난을 행복과 견주지 않기로 했다. 돈이 없으면 냉면을 먹을 수 없지만, 냉면 한 그릇에도 세상을 다 가진 행복함과 냉면을 먹기 전후의 시간은 당장 사라질 돈과 다르게 지금까지 나에게 남겨있음을 더 기억하기로 했다. 여전히 냉면은 비싸고 돈은 없지만 불행하지는 않다. 냉면과 함께라면 언제까지고 행복할 거 같다.
*따릉이?
서울특별시에서 2014년부터 시범 운영을 시작하고 2015년 10월부터 본격적으로 정식 운영을 시행한 완전 무인 공공자전거 대여 서비스이다. (출처: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