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원재희 Oct 24. 2021

예스 셰프!!

〈광화문 국밥〉 설레는 이 내 마음을.

남들은 크게 관심 없을 수 있지만 나에겐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 리스트들이 있다. 가령 특정일에 먹으면 더 맛있는 평양냉면 집이라든지, 먹는 거 잘 아는 사람들 일명 '먹잘알러' 중에서도 취향이 맞는 사람들이라든지, 좋아하는 소설가의 책 중에 제일가는 책이라든지, 영화관에서 좋아하는 자리라든지 등이 있다. 주관적인 마음을 가득 담아 고르고 골라 심사한다. 그러다 보면 이 사람의 평이라면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그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일 경우엔 뒤에 '아저씨'를 붙여 애칭 삼고, 여자일 경우 '언니'로 부른다. 그들은 내가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향해 이름을 막 부를 수가 없는 마음이 호칭에 담겨있다. 남녀 불구하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분들도 있는데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따르고 싶을 때 이런 애칭이 나오는 거 같다. 그건 그렇고 왜 아저씨니, 언니니, 선생님인지 하는 소리를 했느냐면 <광화문 국밥>의 요리사 때문이다.



<광화문 국밥>은 매장명에서 느껴지듯 제일 상위 메뉴는 '돼지국밥'이다. 요리사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선두로 누구든 마음 편히 먹을 수 있게 만든 음식점이라는 걸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됐다. 박찬일 요리사. 그가 바로 <광화문 국밥>의 주방장이다. '글 쓰는 요리사'로 유명한 박찬일 요리사는 평양냉면 애호가 중에서도 애호가로 유명하다 (어디서 유명하냐면 그냥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유명하다). 그럼 나는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면 <성시경의 FM 음악도시> 토요일 코너 '음식도시'의 노중훈 작가를 통해서다. 이 노중훈 작가가 '아저씨'리스트에 오르는 분이다. 우리끼리 (여기서 '우리'는 노중훈 작가의 맛집 리스트를 맹신하는 나와 친구들) 노중훈 아저씨가 어디를 다녀왔다더라 하며 그의 입맛을 믿는다. 노중훈 아저씨를 통해 알게 된 박찬일 요리사. 스스로 셰프보다 주방장이나 요리사로 불리길 바라는 그의 마음과는 달리 난 그를 셰프로 부른다. 앗. 위에 아저씨, 언니, 선생님 어쩌고 해 놓고 이제 와선 '셰프' 소리를 하는 나이다.


박찬일 셰프는 원래 <몽로>라는 이국적인 듯 한국적인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평양냉면 애호가 그중에서도 남대문 <부원면옥>의 단골로 알려진 그가 <광화문 국밥>이라는 새로운 음식점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주 메뉴가 평양냉면과 국밥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옳다구나 싶었다. 박찬일 셰프가 만들어내는 평양냉면에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기대감이 터지기 전까지 부풀었을 무렵 <광화문 국밥>을 찾았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였던 터라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든 날이었다. 하지만 오늘 먹지 않으면 기대감이 터질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바로 양치를 했다. 큰 우산을 썼음에도 지하철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신발이 다 젖었다. 한껏 축축했지만 지하철에 앉고나니 설레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입꼬리가 봄바람이 간지럼을 태우듯 살랑살랑 올라갔다.


5호선 광화문역을 나와 <광화문 국밥>으로 걸어가는 길, 점심시간임에도 직장인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와서 그런가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렇다면 <광화문 국밥>도 줄이 없을 거 같은 느낌이 빗방울처럼 송골송골 맺혔다. 역시 매장 앞엔 사람이 없었다. 평양냉면 마냥 깔끔한 간판을 보고 있노라니 비 오는 날 여기까지 온 내가 기특했다 (스스로를 자주 기특해 하는 편). 오늘의 할 일 중 제일 잘한 일일 거라고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대기 인원은 없었으나 제법 널찍한 매장 안은 직장인들로 꽉 차 있었다.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올려다봤다. 제일 처음 쓰여있는 국밥과 그 밑에 평양냉면. 순면이 따로 적혀있었다. 순면을 하는 집이 많지 않았던 때라 순면을 먹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순면을 먹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던 거로 판단해 그냥 평양냉면을 시켰다 (현재는 메밀 함량을 90%로 늘려 순면과 구분 지어 판매하진 않는다). 찰기가 없는 메밀의 특성상 순면을 뽑아내기 어렵다는데 그 어려운 일을 박찬일 셰프가 해낸 것이다. 당시 조금씩 메밀 함량을 높이는 데 힘을 쏟고 있다는 이야기를 노중훈 아저씨 라디오에서 들었던터라 내 일처럼 기뻤다.



옥빛을 띠는 자기 그릇에 단아하게 담겨 나온 평양냉면을 보니 젓가락을 꽂아 흩트리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순간을 설레게 기다려 온 나는, 바로 젓가락을 정 가운데로 꽂아 면을 저었다. 휘이- 휘이-


맑은 육수 위로는 달걀지단이 올려져 있었다. 다른 고명을 즐기지 않는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일부러 육수에 삶은 달걀노른자를 풀어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메밀향이 살포시 느껴지는 맑은 육수의 맛을 느낄 때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박찬일 셰프가 이런 내 마음을 알 길은 없으시겠지만 계란 지단을 보고 또 설레고 말았다. 처음부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변함없는 맛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았고, 그랬다. 성큼성큼 씹히는 면은 적당한 찰기와 더불어 메밀의 거침 또한 느껴졌다. 여전히 밖은 축축한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한 그릇 비운 나는 어느새 축축함은 사라지고 말끔하고 시원한 느낌만이 가득했다.


비로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부터는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혀를 움직일 수 있는 반경 안에서 움직거렸다. 계산을 하고 내내 가슴 정도만 보이던 주방을 들여다봤다. 굳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혀야만 볼 수 있는 주방을 말이다. 혹시 주방장이 계시려나 싶은 마음에 굳이 들여다본 그곳에 진짜 박찬일 셰프가 있었다. 헉 대박 하며 입을 가렸다.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좋아하는 연예인을 본 듯 얼굴이 붉게 번졌다. 사실 연예인을 만나도 그다지 떨리는 일이 없는데, 내가 정한 '아저씨', '언니', '선생님'을 마주하게 될 때면 꿀 먹은 곰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멈칫하게 된다. 너무 떨리고 설레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주방 안에서 진두지휘하는 박찬일 셰프를 1초 안 되게 보고 나니 수줍어져서 급히 굽힌 허리를 폈다. 한 번 더 보면 눈이 마주칠 거 같아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급하게 매장 밖을 나왔다.


언젠가 <부원면옥>에서 혼자 박찬일 요리사를 마주하곤 너무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알은체하지 못하고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먹었는지 모르게 냉면을 들이켜고 나왔었다. 나와서까지 심장이 뛰어 어딘가 말하고 싶은데 어디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이번에도 박찬일 셰프를 보는 순간 어디다 자랑을 하고 싶었는데... 자랑할 길이 없어 혼자 설레는 마음을 토닥였다.




이전 10화 냉면과 함께라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