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국밥〉 설레는 이 내 마음을.
남들은 크게 관심 없을 수 있지만 나에겐 아주 소중하게 생각하는 몇 가지 리스트들이 있다. 가령 특정일에 먹으면 더 맛있는 평양냉면 집이라든지, 먹는 거 잘 아는 사람들 일명 '먹잘알러' 중에서도 취향이 맞는 사람들이라든지, 좋아하는 소설가의 책 중에 제일가는 책이라든지, 영화관에서 좋아하는 자리라든지 등이 있다. 주관적인 마음을 가득 담아 고르고 골라 심사한다. 그러다 보면 이 사람의 평이라면 어느 정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기는데 그들이 나보다 나이가 많은 남자일 경우엔 뒤에 '아저씨'를 붙여 애칭 삼고, 여자일 경우 '언니'로 부른다. 그들은 내가 이 땅에서 숨 쉬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그들을 향해 이름을 막 부를 수가 없는 마음이 호칭에 담겨있다. 남녀 불구하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분들도 있는데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따르고 싶을 때 이런 애칭이 나오는 거 같다. 그건 그렇고 왜 아저씨니, 언니니, 선생님인지 하는 소리를 했느냐면 <광화문 국밥>의 요리사 때문이다.
<광화문 국밥>은 매장명에서 느껴지듯 제일 상위 메뉴는 '돼지국밥'이다. 요리사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선두로 누구든 마음 편히 먹을 수 있게 만든 음식점이라는 걸 라디오를 통해 알게 됐다. 박찬일 요리사. 그가 바로 <광화문 국밥>의 주방장이다. '글 쓰는 요리사'로 유명한 박찬일 요리사는 평양냉면 애호가 중에서도 애호가로 유명하다 (어디서 유명하냐면 그냥 평양냉면을 좋아하는 사람끼리 유명하다). 그럼 나는 그를 어떻게 알게 되었는가 하면 <성시경의 FM 음악도시> 토요일 코너 '음식도시'의 노중훈 작가를 통해서다. 이 노중훈 작가가 '아저씨'리스트에 오르는 분이다. 우리끼리 (여기서 '우리'는 노중훈 작가의 맛집 리스트를 맹신하는 나와 친구들) 노중훈 아저씨가 어디를 다녀왔다더라 하며 그의 입맛을 믿는다. 노중훈 아저씨를 통해 알게 된 박찬일 요리사. 스스로 셰프보다 주방장이나 요리사로 불리길 바라는 그의 마음과는 달리 난 그를 셰프로 부른다. 앗. 위에 아저씨, 언니, 선생님 어쩌고 해 놓고 이제 와선 '셰프' 소리를 하는 나이다.
박찬일 셰프는 원래 <몽로>라는 이국적인 듯 한국적인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평양냉면 애호가 그중에서도 남대문 <부원면옥>의 단골로 알려진 그가 <광화문 국밥>이라는 새로운 음식점을 열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주 메뉴가 평양냉면과 국밥임을 알게 되었을 때 옳다구나 싶었다. 박찬일 셰프가 만들어내는 평양냉면에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기대감이 터지기 전까지 부풀었을 무렵 <광화문 국밥>을 찾았다. 비가 오는 궂은 날씨였던 터라 귀찮다는 생각이 먼저 든 날이었다. 하지만 오늘 먹지 않으면 기대감이 터질 수 있다는 생각이 스쳐 바로 양치를 했다. 큰 우산을 썼음에도 지하철역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신발이 다 젖었다. 한껏 축축했지만 지하철에 앉고나니 설레는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입꼬리가 봄바람이 간지럼을 태우듯 살랑살랑 올라갔다.
5호선 광화문역을 나와 <광화문 국밥>으로 걸어가는 길, 점심시간임에도 직장인들이 많이 보이지 않았다. 비가 와서 그런가 싶은 마음이 들었는데 그렇다면 <광화문 국밥>도 줄이 없을 거 같은 느낌이 빗방울처럼 송골송골 맺혔다. 역시 매장 앞엔 사람이 없었다. 평양냉면 마냥 깔끔한 간판을 보고 있노라니 비 오는 날 여기까지 온 내가 기특했다 (스스로를 자주 기특해 하는 편). 오늘의 할 일 중 제일 잘한 일일 거라고 엉덩이를 툭툭 건드렸다. 대기 인원은 없었으나 제법 널찍한 매장 안은 직장인들로 꽉 차 있었다. 안내해 주는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올려다봤다. 제일 처음 쓰여있는 국밥과 그 밑에 평양냉면. 순면이 따로 적혀있었다. 순면을 하는 집이 많지 않았던 때라 순면을 먹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순면을 먹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던 거로 판단해 그냥 평양냉면을 시켰다 (현재는 메밀 함량을 90%로 늘려 순면과 구분 지어 판매하진 않는다). 찰기가 없는 메밀의 특성상 순면을 뽑아내기 어렵다는데 그 어려운 일을 박찬일 셰프가 해낸 것이다. 당시 조금씩 메밀 함량을 높이는 데 힘을 쏟고 있다는 이야기를 노중훈 아저씨 라디오에서 들었던터라 내 일처럼 기뻤다.
옥빛을 띠는 자기 그릇에 단아하게 담겨 나온 평양냉면을 보니 젓가락을 꽂아 흩트리기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 순간을 설레게 기다려 온 나는, 바로 젓가락을 정 가운데로 꽂아 면을 저었다. 휘이- 휘이-
맑은 육수 위로는 달걀지단이 올려져 있었다. 다른 고명을 즐기지 않는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일부러 육수에 삶은 달걀노른자를 풀어 먹는 사람들도 있지만, 난 메밀향이 살포시 느껴지는 맑은 육수의 맛을 느낄 때 더 행복하기 때문이다. 박찬일 셰프가 이런 내 마음을 알 길은 없으시겠지만 계란 지단을 보고 또 설레고 말았다. 처음부터 마지막 한 방울까지 변함없는 맛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았고, 그랬다. 성큼성큼 씹히는 면은 적당한 찰기와 더불어 메밀의 거침 또한 느껴졌다. 여전히 밖은 축축한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한 그릇 비운 나는 어느새 축축함은 사라지고 말끔하고 시원한 느낌만이 가득했다.
비로소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부터는 되새김질하는 소처럼 혀를 움직일 수 있는 반경 안에서 움직거렸다. 계산을 하고 내내 가슴 정도만 보이던 주방을 들여다봤다. 굳이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혀야만 볼 수 있는 주방을 말이다. 혹시 주방장이 계시려나 싶은 마음에 굳이 들여다본 그곳에 진짜 박찬일 셰프가 있었다. 헉 대박 하며 입을 가렸다. 아무도 관심 없겠지만 좋아하는 연예인을 본 듯 얼굴이 붉게 번졌다. 사실 연예인을 만나도 그다지 떨리는 일이 없는데, 내가 정한 '아저씨', '언니', '선생님'을 마주하게 될 때면 꿀 먹은 곰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이 멈칫하게 된다. 너무 떨리고 설레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한다. 주방 안에서 진두지휘하는 박찬일 셰프를 1초 안 되게 보고 나니 수줍어져서 급히 굽힌 허리를 폈다. 한 번 더 보면 눈이 마주칠 거 같아 벌겋게 달아 오른 얼굴로 급하게 매장 밖을 나왔다.
언젠가 <부원면옥>에서 혼자 박찬일 요리사를 마주하곤 너무 놀랐던 적이 있었다. 그때도 알은체하지 못하고 코로 먹었는지 입으로 먹었는지 모르게 냉면을 들이켜고 나왔었다. 나와서까지 심장이 뛰어 어딘가 말하고 싶은데 어디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이번에도 박찬일 셰프를 보는 순간 어디다 자랑을 하고 싶었는데... 자랑할 길이 없어 혼자 설레는 마음을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