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미 평양냉면> 점과 점이 만나 선을 이루다.
방바닥이 나인지, 내가 방바닥인지 모르는 날이었다. 시계를 보니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있었고 이때까지 고프지 않던 배가 밥 먹을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확인하고부터는 갑자기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뭘 좀 먹을까 싶어 냉장고를 열어 봤는데, 김치만 종류별로 있을 뿐 구미가 당기는 마땅한 음식이 없었다. 이럴 때는 라면만 한 것이 없기에 냄비에 물을 담아 가스레인지 위로 올렸다. 물이 끓기까지 텔레비전을 보려고 리모컨을 돌리는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수요 미식회>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중간부터 시작되어 정확히 무슨 편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평양냉면' 나왔다. 평양냉면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 돌리던 리모컨은 이미 홀린 듯 멈췄다. 그날 소개된 냉면은 여의도, 논현동, 장충동에 있는 곳이었다. 여의도와 장충동은 이미 유명한 곳들이었고, 먹어보지 못한 한 곳의 냉면집이 바로 논현동의 <진미 평양냉면>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냉면을 화면으로 만나버리고 나니 라면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얼른 부엌으로 가 라면 물을 버리고 다시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진미 평양냉면>의 소문은 익히 들었다. 냉면에도 계보가 있는데 <진미 평양냉면>은 3세대로 불렸다. 신생 냉면집 중에서도 기대해 볼 만한 곳이라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들었다. 맛있는 하나를 질리지 않게 오-랜 시간 먹을 줄 아는 나라서 새로운 맛집을 탐색하는 것을 즐겨하진 않는다. 새로운 곳에 가서 맛있을지 없을지 불확실한 음식을 먹는 것보다 확실히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 더 좋다(이건 음식뿐만 아니라 삶의 대부분에 적용된다. 새로운 것보단 익숙하고 확실한 것이 더 끌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미 평양냉면>은 언젠가 한번은 꼭 가봐야지 생각했던 곳이다. 입맛이 비슷한 몇 사람의 후기를 샅샅이 살펴보기도 했었고 냉면의 모습도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냉면은 아니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진미 평양냉면>을 이야기하는 패널들이 예사롭지가 않다. 일단 MC 신동엽에게 이 집을 알려준 이가 가수 성시경 (<필동면옥>을 최애로 꼽는 대표 연예인)이었다는 말에 벌써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필동면옥> 편을 읽은 분이라면 들썩거리는 엉덩이가 이해가 될 텐데, 난 그의 입맛을 신뢰한다. 덕분에 라면 생각은 온데간데없어졌고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열정적 양치를 시작했다. 방금 전, 의욕 없이 방바닥에 붙어 있던 것이 아주 무색할 정도의 열정이었다. 오직 '평양냉면', 오직 <진미 평양냉면>을 당장 먹지 않으면 안 될 열정으로 분주히 움직였다.
잠깐 논현동에 살기도 했기에 낯선 길은 아니었다. *나산백화점이 있던 강남구청역에서 내려 학동역 방면으로 걸어가니 이 동네에 살았던 때가 떠올랐다. 우리 집 공식 말썽쟁이였던 아빠 때문에 응봉동에 살다가 논현동으로 이사를 갔었다. 어른이 되어서도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살아가는 아빠로 인해 할아버지가 강 건너로 이사를 보낸 이유였다. 한강을 헤엄쳐서라도 친구들과의 의리는 끝까지 지켰을 아빠에게 강남과 강북은 큰 상관이 없었던 거 같다. 아무튼 갑자기 논현동에 살게 된 나는 당시 사립초등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아파트에 살 때는 느껴보지 못한 부자의 삶을 논현동에서 체감했다. 같은 아파트 단지, 같은 초등학교를 다녔을 때는 집의 모양새가 거의 비슷했기에 누가 부자고 누가 더 부자인지 티가 나지 않았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끼리는 알고 있었을지 몰라도 초등학생의 눈으로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90년대 아이들은 지금보다 조금 더 순수하기도 했을 테고. 그런데 강남으로 넘어가니 드라마에서나 보던 대저택에 사는 친구들이 넘쳐흘렀다. 친구네 집에 놀러 갔는데 큰 대문을 들어가니 연못에 마당까지 있고, 다시 큰 문을 통과해야 비로소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어서 입을 쩍 벌린 적도 있었다. 친구 방이 세분화되어 잠자는 방과 공부, 바이올린 하는 방이 모두 따로 있었던 것에 깜짝 놀라기도 했다. 제일 놀랐던 건 학부모 회의 때에도 청바지를 입고 다니던 우리 엄마와 달리 집안에서 드레스업하고 화장에 머리까지 제대로 갖추고 있던 친구네 엄마였다. 모든 게 드라마 세트장 같았다. 창피함을 잘 모르던 나였는데, 그런 친구들이 우리 집에 오면 다시 자기네 집으로 가자는 말을 자주 들으니 우리 집이 별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사립초등학교는 다니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도 형편읜 차이가 존재함을 느껴버렸다. 이후 우리 집은 가세가 기울었고 그때 광진구로 이사를 갔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지금도 잘 사는 집의 자식이었음 지금처럼 자라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 모든 상황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내기 위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하며 조금은 초라해도 지금 내 모습을 인정하고 만족한다. 지난 시간에 감사하다. <진미 평양냉면>으로 향하는 길에 별 생각을 다 했다.
평양냉면을 먹으러 가는 길마다 나의 지난 시간이 있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드는 거 같다. 그런 점에서 평양냉면이라는 점과 나라는 점은 어떤 선으로 이어져 있음이 확실하다. 나를 이루는 시간 사이마다 찍혀 있는 평양냉면이라는 점이 있다. 그 점들이 이어져 나를 그려낸다. 별 생각을 다 하다 보면 <진미 평양냉면>을 마주하게 된다. 또 어떤 점을 직고, 어떤 시간이 이어질까 하는 기대가 생긴다.
애호가들에겐 <진미 평양냉면>을 꼭 가봐야 하는 마땅한 이유가 있는데, 그건 다 주방장님의 경력 때문이다. 평양냉면은 양대 산맥이 있다. 한 산맥은 '의정부파'이고 다른 한 산맥은 '장충동파'다. 양대 산맥의 주방을 모두 섭렵한 주방장이 <진미 평양냉면>을 오픈했으니 이곳이 과연 어떤 맛일지 애호가들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너무 궁금했다. 절대 섞일 수 없을 거 같던 '의정부파'와 '장충동파'를 잇는 <진미 평양냉면>.
주문과 동시에 제면기에 냉면 반죽이 들어갔다. 주방이 보이는 자리에 앉아 냉면 그릇이 나에게 오는 순간만을 기다렸다. 옆에 혼자 온 할아버지가 냉면 하나 만들면서 늦게 나온다고 성을 냈다. 뭘 얼마나 기다렸다고 성을 내나 싶긴 했지만 할아버지 덕분에 도리어 내 냉면은 빨리 나온 거 같았다. 첫만남이니 면을 풀기 전에 육수의 맛을 봤다. 첫입에 '장충동파'를 대표하는 <평양면옥>이 보였다. 어스름하게 올라오는 육향이 깔끔하니 입에 맞았다. 면을 풀어 다시 맛을 봤는데 메밀이 풀리며 흐릿해진 육향에 메밀 향이 덮혔다. 좋아하는 맛이었다. 맛만 봤을 뿐인데... 아직 면은 걷어 올리지도 않았는데... 육수가 모자라 추가했다. 넉넉히 육수를 받고서야 촉촉이 적신 면을 튀기며 한 움큼 집어 먹었다. 우물거려보니 이건 또 '의정부파'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냉면 한 그릇에 양대 산맥이 들어있으니 어찌 맛이 없을 수가 있겠나. 뚜렷한 양대 산맥의 맛을 장점들만 쏙쏙 뽑아 하나로 이어 주니 감사할 따름이다.
처음을 두려워하는 내가 아주 맛있게 먹은 한 그릇이었기에 계산을 하고 한마디 덧붙였다. 너무 맛있었다고 정성을 담아 또박또박 말했는데, 앞으로 더 잘하겠다는 인사를 고개 숙여 해 주셨다. 이런 맛이라면 앞으로 논현동에 올 때마다 <진미 평양냉면>을 찾을 거 같은데, 맛있었다고 인사하는 손님에게 더 잘하겠다는 답변은 지금의 맛이 변치 않을 거 같다는 믿음까지 생기게 했다. 단연, 평양냉면의 *신흥강자였다.
*나산백화점?
강남구청역 사거리에 위치하던 백화점. 현재는 철거되었고 더 피나클 강남이 들어섰다. (출처: 위키백과)
*신흥강자?
새로 출천 해서 급부상하여 강세를 이루고 있는 사람을 이르는 말.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당시 <진미 평양냉면>은 새롭게 문을 연 냉면집들 중에 단연 신흥강자였으나 이후로 평양냉면을 파는 곳들이 줄줄이 생겨 지금은 '신흥'이라고 불리기엔 애매한 경향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진미 평양냉면>과 <배꼽집> 정도까지가 신흥강자였고 뒤로는 신흥도 강자도 찾지 않았다. 찾기엔 너무 많은 곳이 생겼고, 성격 따라 알고 있는 맛있는 곳을 계속 찾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