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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펑예 Oct 22. 2024

부모가 사랑이 없다는 건

소설 <맡겨진 소녀>에 대한 과몰입 리뷰  

"아빠."


이 말을 끝으로 이야기는 끝났다. 나는 책장을 덮으며 그 마지막 장면을 몇 번이나 곱씹었다. 그리고 잠들기 전에도 그 장면을 떠올리고는 끝내 울컥해서 코를 (또) 훌쩍였다.  


거의 1년 만에 잡은 소설이었다. 요즘은 OTT의 노예가 되어 소설 쪽에 손이 안 간다. 그런데 오며 가며 자꾸 눈에 들어오길래 결국 주문으로까지 이어졌다. 게다가 얇디얇다는 것도 한몫했다. 시간적 부담이 없다니 너무 좋다. 요 전에 읽었던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은 작가 후기 제외 761쪽에 달했다. 하루키나 됐으니 읽었지.


제목은 <맡겨진 소녀>. 제목 자체로서는 전혀 흥미도 당기지 않고 호기심도 일지 않는다. 어딘가에 맡겨진 주인공이 파란만장한 경험을 해나가는 이야기는 얼마든지 있으니 말이다.  


다음은 주인공, 당연히 소녀다. 나이는 정확한 언급이 없으나 열 살 내외가 아닐까 싶다. 아일랜드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소녀는 언니가 둘이나 셋이 있고 남동생도 하나 있는 가운데 아이다. 그런데 막내 남동생이 또 태어난 상황. 입을 하나 덜려는 생각으로 부모는 소녀를 먼 친척에게 보낸다. 


소설은 아이, 그것도 나이보다는 훨씬 섬세한 감성을 가진 아이의 눈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슬퍼, 화나라고 표현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아이는 그 감정들을 그저 삼키거나 잊고 싶어 하는데 그것이 참 마음 아픈 포인트다.


얼마 동안 맡아달라고 하지?

원하는 만큼 데리고 있으면 안 되나?


간밤에 이렇게 부모가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던 아이는 아빠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서 누워 어떤 집에 맡겨질지를 상상한다. 그리고 아빠가 그 부부에게 자신에 대해 "먹을 건 엄청 축낼 겁니다"라고 이야기하고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라는 말뿐 나중에 데리러 오겠다는 작별인사 같은 건 없이 떠나버리는 모습을 바라본다. 짐작하겠지만 빌런은 아빠라는 새끼다. 

때로 거칠고 무심한 성격에서 나오는 언행이 얼마나 큰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생각해봤다. 아이에게 말한 불구덩이 드립 역시 이야기를 끝까지 읽으면 제정신으로는 하기 힘든 소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다행히(!) 소녀를 맡아준 킨셀라 부부는 빨간 머리 앤의 마릴라와 머슈처럼 좋은 사람들이었다. 미스터리물에 익숙한 이 내 머리는 끊임없이 아이에게 닥칠 혹독한 시련의 단서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런 것은 없었다. 

                 맡겨진 소녀의 대표작 <빨간 머리 앤>


첫날부터 아주머니는 엄마와 다른 어떤 손길로(아마도 '정성껏'이 아닐까 싶다) 목욕시켜 주고 옷을 입혔다. 그리고 그날 밤 긴장을 해 매트리스에 실수를 했지만, 습기가 많아 빨아서 말려야 한다고 그 실수를 덮어주기도 했다. 아주머니가 시트를 들출 때까지만 해도 아이는 솔직히 말하고 집으로 돌려보내지는 것으로 끝내고 싶었다. 그것이 아이가 알고 있는 어른들의 반응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머니도 아저씨도 그것을 들추어내지 않는다. 다만 아침부터 매트리스 빨래로 힘을 뺐다며 베이컨을 구워준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이 편안함이 끝나기를 - 축축한 침대에서 잠을 깨거나 무슨 실수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리기를 - 계속 기다리지만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 

 

나처럼 아이도 이렇게 평화롭고 좋아도 되는 건지 그것이 오히려 불안한 시간들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는 입방정 떠는 이웃 사람 때문에 킨셀라 부부가 가진 불행을 알게 된다. 그들은 바로 몇 년 전 아들아이를 잃었다. 그리고 자신이 입던 옷이 바로 그 아들의 옷이었다. 


혼란스러울 소녀를 데리고 아저씨는 바닷가로 산책을 나간다. 소녀는 아저씨의 손을 잡으며 아빠가 한 번도 자신의 손을 이렇게 잡아준 적이 없음을 깨닫고 그 생각에 마음이 괴로워진다. 책 후면에 적힌 대로다. 사랑과 다정함조차 아플 때가 있는 것이다. 태어나 그것을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이에게는. 


아저씨는 "무서울 거 없다"라며 물에 빠져서 해변으로 밀려온 망아지들도 잠시 지쳤을 뿐 멀쩡했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사람을 믿으면서 실망하게 된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리고 바다 저편에 반짝이는 불빛 두 개 사이로 또 하나의 불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아저씨는 소녀를 자신의 딸처럼 꼭 안아준다. 


"보이니?" 아저씨가 말한다.

"네." 내가 말한다. "저기 보여요."

바로 그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 


이 장면은 아저씨가 아이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리고 그것을 아이도 잘 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이 영상이 줄 수 없는 소설의 매력이 아닐까 싶다. 풍경과 장면들을 설명했을 뿐인 그 글이 머릿속에서 그림이 되고 거기에 깃든 감정이 증폭되어 가는 것 말이다. 이 장면은 다시 읽어도 너무..ㅠㅠ


또 인상적인 것은 우물씬이다. 첫날 소녀는 아주머니를 따라 물을 길으러 근처 우물로 간다. 그리고 우물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차에서 내렸을 때처럼 집시 아이의 모습이 아니라 아주머니가 깨끗이 씻어주고 옷을 갈아입은 모습이기를 기다린다. 그리고 머그잔으로 물을 마신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아이는 아빠가 준 상처를 우물을 삼키며 씻어보려 한다. 그리고 우물 장면은 마지막에 클라이맥스로 다시 등장하는데 아이의 변화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장치일 것 같다. 작가는 우물에 비친 소녀의 물 그림자, 그 이미지에서 이 소설이 나왔다고도 했다. 


영원이었으면 하는 그 여름이 끝나고 집으로 데려다 달라는 부모의 편지가 도착한다. 


저자 클레어 키건. 찾아보니 아일랜드 출신으로 오웰상 수상, 부커상엔 최종후보에 올랐고 24년간 소설 단 네 편을 냈는데 모두 이렇게 볼륨이 적다. 키건의 작법 철학이 그렇다고 한다. 되도록 간결하게 보여주고 부연 설명하지 않는다. 가려진 이야기는 독자의 지력에 맡긴다.

촌철살인이라는 단어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공감이 가는 미학적 자세인데 이걸 시인도 아니고 소설가가 실행해 옮겼다는 게 대단하다 싶다. 소설가는 기본, 하고 싶은 이야기가 흘러넘치는 종족이 아닌가.

작가는 소설 속에서도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다"는 등,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여러 차례 그 의견을 전한다.


부모가 자신에 대한 사랑이 없다는 건 그 아이에게 얼마나 가혹한 일일까를 생각해본다. 눈을 떠 모든 것이 낯선 세상, 유리잔처럼 쉽게 깨져버리고 말 듯한 그 연약한 존재가 따스한 온기를 느낄 구석이 하나 없다는 것은. 그리고 잠시나마 느낀 아버지의 사랑을 꿈을 꾼 것처럼 모두 잊고 돌아와야 된다는 것은 또 얼마나 가혹한가. 하지만 꿈은 아니기에 소녀는 예전과 비슷하지만 아주 같지 않은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마지막 부분은 그래서 더 울컥한다. 소녀가 부디 아기 안킬로사우르스 맛있겠다 처럼 행복하길 빈다. 





#루바브_타르트가_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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