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쓰네 <폭싹 속았수다> 리뷰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많이 했다. 세상 일이 그렇겠지. 계속 맑을 수 없고 그렇다고 계속 흐리지만도 않은 것. 그래서 3대의 인생을 다룬 모처럼 긴 서사극에 몰입할 수 있었던 것 같다.(그에 비해 회차가 그리 길진 않았지만)
애순이와 관식이 육지로 떠나는 모험을 감행했을 때는, 애순이가 맘껏 원하는 대로 살면서 시인이 되었으면 했지만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라 예상했고 둘이 결국은 헤어지려나 했을 때는 정말 그렇게 돼버리면 너무 실망해서 누가 극을 계속 보겠나 했다. 그 이후도 마찬가지다. 행복해하고 있으면 곧 어떤 시련이 닥칠까 불안해졌고 고통을 겪고 있으면 그래도 봄이 오지 하고 마음을 다스렸다.
그리고 누구나 살면서 뜻하지 않은 불행을 맞기도 하지만 그것에 완전히 잠식되지 않고 이겨나갈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랑'이라는 아주 보편적인 교훈을 생각했다.("Love wins All"을 불렀던 아이유가 여기선 그걸 연기로, 일맥상통하는 메시지를 전했다)
애순을 "하루도 외롭게 한 적 없는" 관식의 사랑은 물론, "저만 잘났지?" "진짜 짜증 나" 서로 모진 소리를 하지만 모든 것을 희생해주는 가족들, 서로에게 무참히 상처를 주기도 하던 친척과 이웃들이 보내는 절절한 연민, 그 또한 '정'이라는 이름의 인간애다. 심지어 최고의 인기 캐릭터이자 빌런인 학씨 마저 사실은 돈보다 사랑이 좋은 사람이었다.
여기서 가장 온기 없이 차갑고 불행해보이는 인생은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듯한 영범이네다. 금명이와 그 집안이 탐탁지 않아 무례하게 구는 영범이네 엄마와 영범이의 미래를 잠깐 그리는 장면은 갑자기 장르가 거의 호러로 바뀐 듯하다. 온기가 꺼진 인생의 풍경이야말로 호러니까.
제주로 대표되는, 온정이 살아있던 세상에서 서울이라는 자본주의의 짙은 그늘이 드리워진 세상이 서로 격하게 비교된다. 우리나라는 그렇게 돈이 왕좌에 올라 사람보다 먼저인 세상이 되어갔다. 그래서 재벌 등 재력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돈에 미쳐 벌어지는 사건들이 난무하는 이야기들에 익숙해져 우리 입에서도 "뭐니 뭐니 해도 머니지"라고 진심을 담은 우스갯소리를 종종 내뱉다가 이 제주의 이야기에 고만 '노스탤지어'가 건드려졌던 것이다. 그래서 엄마 아빠, 친척, 이웃, 첫사랑 등 먼 옛날에 나를 따뜻한 마음으로 품어주었던 누군가를 아삼삼 떠올리고는 결국 울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것이 AI가 몇 초 만에 그림과 음악을 만들어내는 시대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듯한 시들로 표현되었다는 것도 그렇다. 참말,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 사랑이 있다면 이겨내지 못할 것이 없다.
ps- 극 중 오애순의 시 하나 올려본다.
ㅊㅅㄹ
있으면 귀찮고 없으면 궁금하고
내가 뭐라면 괜찮고 남이 뭐라면 화나고
눈 뜨면 안보는 척, 눈감으면 아삼삼
만날 보는 바당 같아 몰랐다가도
안 보이면 천지에 나 혼자 같은 것
입안에 몰래 둔 알사탕처럼
천지에 단물이 들어가는 것
그게 그건가 그게 그건가
그래서 내 맘이 만날 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