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첫눈과 첫사랑의 유사성

by James Kim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느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성자 중에서 이단자가 나오고 선견자 중에서 신들린 무당이 나오듯이......

아드소, 선지자를 두렵게 여겨라.

그리고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에서 윌리엄 수도사가 아드소 에게 이르는 말 가운데서 (871쪽)


첫눈은 첫사랑과 비슷하다.


첫눈은 언제 오는지 모르게 가만히 소리 없이 내린다. 하늘에서 하나 둘 하얀 솜털인 듯, 아니면 먼지인 듯 뭔가가 날리어 주변을 맴돈다. 뭐지? 하고 올려다본 하늘엔 작고 여린 눈송이들이 천천히 맴을 돌며 내려온다.

아! 첫눈이로구나!

그제야 첫눈의 감동이 밀려와 가슴에 와닿는다.

점차 내리는 하얀 눈은 바람에 이리저리 쓸리우다 언제인지 모르게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들어 놓는다. 첫눈은 세상의 온갖 색깔들과 허물과 더러움을 흰색의 순수로 덮어버려 모든 것이 깨끗하게 보이게 하는 마법을 부려놓는다.

백설의 마법에 빠지면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축복으로 가득한 마음이 된다. 하얀 눈에 감동한 아이들은 두 팔을 들어 휘날리는 눈을 잡으려 소리를 지르고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눈 속을 겅중겅중 뛰어다닌다. 감동에 인색한 어른들도 그 모습을 보며 입가에 가만히 미소를 떠올린다.

이것이 첫눈이 우리에게 선사하는 마법의 즐거움이다.


첫사랑도 첫눈의 마법과 비슷하게 다가온다. 첫사랑도 언제 오는지 모르게 가만히 소리 없이 다가와 이게 뭐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한다. 하늘에서 하나 둘 하얀 솜털인 듯, 아니면 먼지인 듯 뭔가가 날리어 주변을 맴돌던 첫눈처럼 첫사랑도 소리 없이 의미 없이 살며시 다가와 주변을 환하게 바꾸어 놓는다.

첫사랑은 언제인지 모르게 세상을 온통 하얗게 만들어 모든 것을 아름답게 치장하는 첫눈의 마법처럼 세상의 온갖 어려움과 고통을 용서와 화해라는 관용의 마음으로 덮어버려 힘들었던 세상사 모든 일이 정당하고 살만한 가치가 있는 긍정적인 세상으로 보이게 하는 마법을 부려놓는다.

백설의 마법에 빠지면 온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축복으로 가득한 마음이 되듯이 첫사랑의 마법에 빠진 사람도 또한 그렇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닐까.

첫눈에 대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없듯이 첫사랑에 대한 감동을 모두가 애틋하게 가지고 있다. 첫사랑이 아름답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첫사랑이 순수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는가. 모두는 첫사랑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을 갖고 있다. 이루어지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추억은 더욱 아름답고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아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만약 첫사랑이 이루어져서 결실을 보았다면 그 감동의 결과치는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의 결과치에 비해 현저하게 감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사랑을 결과치로 따지려 하는 무지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W.B 예이츠(William Butler Yeats)는 아일랜드의 시인이자 극작가이다. 20세기 영문학과 아일랜드 문학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되는 그가 22세인 연극배우 모드 곤을 처음 만나 사랑에 빠졌을 때 첫 만남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옛 책에 나오는 봄의 화신 같았다.

그 얼굴은 빛을 받은 사과꽃처럼 빛났다.

처음 본 날 그녀는 창가에 서 있었는데,

그녀 뒤로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사랑에 대한 아름다운 찬사의 서구적인 표현을 감상하셨다면 우리의 정서에 걸맞은 첫사랑의 시 한 편을 첫눈을 보듯이 읽어 보자.


첫사랑

- 김소월

아까부터 노을은 오고 있었다.

내가 만약 달이 된다면

지금 그 사람의 창가에도

아마 몇 줄기는 내려지겠지

사랑하기 위하여

서로를 사랑하기 위하여

숲 속의 외딴집 하나

거기 초록빛 위 구구구

비둘기 산다

이제 막 장미가 시들고

다시 무슨 꽃이 피려 한다.

아까부터 노을은 오고 있었다.

산너머 갈매 하늘이

호수에 가득 담기고

아까부터 노을은 오고 있었다.


첫사랑이 살포시 모르는 듯 다가오듯이 첫눈도 살포시 안 오듯이 내려야 하는데 이번 첫눈은 첫눈치고는 갑자기 너무 많이 내려 퇴근하는 운전자들을 골탕 먹이고 접촉사고를 유발하여 민폐를 끼친 것 같다.


한 주간을 오롯이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정독해 읽었다. 왜 이 작가를 문학계의 공룡이라 부르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참 기독교인이라면 상대가 이교도들이라고 하더라도 배울 것은 배워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윌리엄 수도사가 아드소 수련사에게 하는 말)에서 -40쪽


‘책이 없는 수도원은 재산이 없는 도시, 군대 없는 성채, 그릇 없는 부엌, 먹을 것 없는 밥상, 풀 없는 뜰, 꽃 없는 목장, 잎 없는 나무 같은 것이지요.’

(베네딕트 수도원장이 윌리엄 수도사에게 하는 말)에서 –77쪽


‘안된다. 베렝가리오.

나에게 고해를 청하지 마라

네 입을 여는 것으로 내 입을 봉하려 하지는 말라는 말이다.

침묵은 구하지 말라.

이 수도원 안에는 그렇지 않아도 침묵이 너무 흔하다.

(윌리엄 수도사가 고해를 청하는 베렝가리오에게 하는 말)에서 –215쪽


‘젊은 사람들은 노인들보다 잠이 더 필요하다.

노인들은 이미 잘 만큼 잔 데다 또 한차례의 영원한 잠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다.’ -334쪽

‘가는 길은 모두 옳았으나 모두가 잘 못 가고 있었다.’ -374쪽


‘내 욕망의 끈을 풀게 하고, 내 갈증을 적셔준 당사자의 부재는, 돌연 그 욕망의 허망함과 갈증의 사악함에 눈을 뜨게 했다.

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

짐승이란 무릇, 교미를 끝내면 쓸쓸해진다.’

(아드소 수련사의 독백)에서 –452쪽


‘사물을 꿰뚫어 아는 데는 지식이 사랑만 같지 못하다.’

‘Amor est magis cognitivus quam cognito’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 서방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502쪽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움베르토 에코 ‘장미의 이름’ Ending)에서 -885쪽


춥다.

벌써 봄이 그리워진다.


Friday, December 5th.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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