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분은 억압이 아니다.

‘ 君君 , 臣臣 , 父父 , 子子 ’

by James Kim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관심을 받길 원하고 자신이 중요한 사람이라 여기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누군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그를 보고 그의 말을 듣고 있다는 걸

알게 해주는 것입니다.”


- 오프라 윈프리



설 연휴가 끼어있는 바쁘고도 분주한 한 주가 저물어 가고 있다. 날씨는 점차 온화함을 유지하고 미세먼지도 다소 주춤하여 산책을 하기에도 무리 없는 날씨가 이어지고 있다.


세상을 아무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아가는 일상의 일들이 만만치 않음을 다시 한번 느끼면서 한 주를 보내고 있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한평생을 온전히 최선을 다해 노력하면서 아름다운 결과물을 도출하며 사는 일이란 복잡하고도 지난한 일의 연속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만약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아름다운 꽃길과 탄탄대로만을 걸으면서 사는 일이라면 얼마나 밋밋하고 긴장감이 떨어지는 삶이 되겠는가. 이러한 삶은 극적인 텐션(tension)이 전혀 없는 드라마화 되지 못하는 지극히 평범한 갑남을녀(甲男乙女)의 그렇고 그런 일상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피땀을 흘리면서 각고(刻苦)의 노력을 경주하여 인생의 극적인 반전을 꾀하는 많은 청춘들이 도처에 널려있으며, 오늘도 가족의 안녕과 풍요를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수많은 중년의 가장들이 우리의 주변에 산재해 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겠다는 굳센 의지로 한발 한발 소중한 경험을 몸으로 체득하며 오늘도 힘을 내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 모습이 짠하면서도 아름다움으로 다가온다. 남에게 의탁(依託) 하지 않고 스스로 자립을 위하여 노력하는 많은 불굴의 정신을 가진 젊은이를 보는 일은 그저 기쁘다. 잘못된 일에 대하여 남 탓을 하지 않고 스스로를 돌아보며 자각하고 인정하면서 고쳐나가는 이를 볼 때 나는 인간의 위대함을 생각하게 된다.

인간은 거의 누구나 편안함을 추구하고 번영과 안식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자신이 이 세상에 꼭 필요한 중요한 사람이길 원하고, 그렇게 인정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 세상은 그리 만만한 놀이터와 같은 마당이 아니다. 편안함과 안식을 추구하면서 남에게 특별하다고 인정받기를 원하는 방정식은 쉽게 존재할 리가 없다. 금수저를 가진 부잣집 자녀로 태어나 고생 없이 펑펑 돈이나 낭비하면서 친구들에게 특별한 사람으로 인식을 받는 일은 가진 돈이 사라지면 그의 특별함도 연기처럼 사라지게 된다.


공자는 논어 안연편에서 정명론(正名論)에 대해 이렇게 강조하고 있다.


‘ 君君 , 臣臣 , 父父 , 子子 ’

‘군주에게는 군주의 본질이 있고,

신하에게는 신하의 본질이 있으며,

아비에게는 아비의 본질이 있고,

자식에게는 자식의 본질이 있다.’


이 말은 각자의 소임에 대하여 간략하면서도 정확하게 지목하고 있다.

정명론을 더 확대해서 펼쳐보면 이런 말이 되지 않겠는가?

남편에게는 남편의 소임이 있고, 아내에게는 아내의 소임이 있다.

학생에게는 학생의 역할이 있고, 선생에게는 선생의 역할이 있다.

정치가에게는 정치가의 의무가 있으며, 유권자에게는 유권자의 권리를 올바르고 냉철하게 설정해야 할 의무가 있다.


다시 말해 우리 모두에게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업무와 본분을 소중히 지켜 엄정하게 실천해야 할 본질을 얘기하는 것이다. 이렇게 자신의 처지와 본분을 지키면서 세상을 엄중히 살아갈 때 상식적인 흐름이 우리 주변에 생겨나는 것이다. 타인이나 약자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은 결국 세상을 혼탁하게 만들고, 그 흐름을 오염시키는 길이 되고 만다.

인간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소명 역할을 맡은 존재다. 그 역할은 단순한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공동체 속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윤리적 위치이기도 하다.

자신의 본분을 엄정하게 실천한다는 것은 외적 규율을 따르는 일이 아니라, 스스로를 절제하고 책임을 자각하는 일이다. 이러한 자각이 축적될 때 사회는 억지로 통제되지 않아도 상식의 질서를 회복한다.


반대로 타인과 약자를 외면한 채 자신만을 중심에 두는 삶은 관계의 균형을 무너뜨린다. 공동체는 보이지 않는 신뢰와 배려의 연쇄 위에 서 있는데, 그 줄이 끊어질 때 세상은 혼탁해진다. 결국 사람의 본분은 개인의 도덕을 넘어 사회의 질서를 지탱하는 보이지 않는 기둥과도 같다.

그러므로 본분을 지킨다는 일은 결국 자신을 다스리는 일이자, 세상을 바로 세우는 가장 근원적인 실천이라 할 수 있다. 결국 공동체의 질서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각자가 맡은 자리에서 흔들리지 않는 책임의 무게 위에 세워진다.

한 사람의 성실함이 미미해 보일지라도, 그 작은 결이 모여 사회의 도덕적 체계를 이루는 법이다. 우리가 지키는 하루의 태도가 곧 사회의 윤곽을 빚어낸다는 점에서, 본분은 사적인 덕목이 아니라 공적인 토대가 된다.


그래서 본분은 억압이 아니라 자유의 다른 이름이며, 책임은 구속이 아니라 공동체를 지탱하는 힘이 된다.

바람이 불어도 쓰러 지지 않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흔들림을 견디는 존재들이 있을 때 세상은 쉽게 기울지 않는다. 결국 세상을 밝히는 것은 특별한 누군가의 영웅적 행위가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스스로를 다스리는 조용한 용기인지도 모른다.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2장을 여기에 적어보니 어떻게 사는 것이 현재를 올바로 용기 있게 본분을 지키며 사는 삶인지 고찰해 보기를 바란다.


‘세상 사람들 모두가 아름답다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 혐오스러울 수 있고, 세상 모두가 선하다고 여기는 것들이 실제로는 선하지 않을 수 있다.

있음과 없음도 상대가 있어야 생겨나고, 어려움과 쉬움도 상대가 있어야 성립되며, 길고 짧음도 상대가 있어야 비교가 가능하고, 높고 낮음도 그 상대가 있어야 차이가 있으며, 음악과 소리도 그 상대가 있어야 리듬이나 멜로디가 발생하고, 앞과 뒤도 그 상대가 있어야 앞서고 뒤따름이 생긴다.


그리하여 성인은 무리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모든 일에 대응하고, 말하지 않는 가르침을 보여준다.

모든 것을 거부하거나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무언가 주어져도 소유하려 하지 않으며, 수고스러운 일을 하더라도 거기에 기대려 하지 않으며, 어떤 공적을 쌓더라도 거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어떤 것에도 머무르거나 집착하지 않으니 그 어떤 것도 그를 떠나거나 그에게서 사라지지 않는다.’

늘 마음이 허전하고 불안한 우리를 위하여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책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에서 이렇게 썼다.


‘내가 좀 더 강하면 좋을 텐데, 좀 더 힘주어 너를 안고 좀 더 믿음직한 말을 해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하지만 지금의 나는 아직 그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 사실을 슬프게 생각한다.’


어찌할 수 없는 이 상황에서 나도 같은 말을 할 수밖에 없구나!


나를 용서해 다오!




Friday, February 20th. 2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