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다면 뜨거운 거야

설득할 대상이 아닌 것들

by 이진호

우리 큰아이, 지원이가 서너 살쯤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어느 설 연휴, 서울 본가에 부모님을 뵈러 올라갔을 때였다. 지은 지 오래된 단독주택이라 아파트처럼 훈훈하진 않았고, 날씨는 제법 추웠다. 그날 저녁, 지원이를 목욕시키려고 욕실에 물을 받았다. 물 온도가 적당한지 분명히 확인했지만, 지원이는 물에 손을 담그자마자 "너무 뜨거워!" 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당황한 나는 직접 물 온도를 확인했다. 아이라는 걸 감안해도 적당한 온도였다. "아냐, 이 정도면 괜찮아. 좀 지나면 더 식을 거야" 하며 달래려 했다. 하지만 지원이는 한사코 고개를 저으며, 계속 뜨겁다고 했다.


욕실이 추워서 물까지 미지근하면 감기에 걸릴까 걱정도 됐다. 씻겨야만 하는 상황이니, 어떻게든 설득해야겠다는 마음이 앞섰다. 그렇게 아이와 실랑이를 벌이는 중, 옆에서 지켜보시던 어머니가 한마디 툭 던지셨다.


"애가 뜨겁다면 뜨거운 거야."


무심한 말씀이었지만, 정곡을 찔렀다.


‘하긴 그렇지. 뜨겁게 느껴진다는 데, 아니라고 설득해서 될 일이 아니지.’


그 순간 깊이 깨달았다. 감각이나 감정이라는 건 설득의 문제가 아니란 걸. 누군가 어떤 걸 느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있는 그대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걸.


생각해 보면 어머니는 늘 그러셨다. 형과 내 생각을 억지로 바꾸려 하신 적이 거의 없었다. 때론 그게 더 어려운 태도일 텐데도, 언제나 내 판단과 감정을 먼저 존중해 주셨다. 그 마음이 이제 와닿는다. 어머니는 우리를 그렇게 키우셨구나.


그날, 나는 지원이가 "이제 괜찮아"라고 할 때까지 물 온도를 낮췄다. 내 손에는 너무 미지근하게 느껴졌지만, 중요한 건 아이가 어떻게 느끼느냐였다.


그 후로는 사람의 감정을 대할 때, 우선 그대로 인정하려고 한다. 내가 보기엔 아무 일도 아닌 것이, 누군가에겐 분명히 '뜨거운' 일일 수 있으니까.

keyword
작가의 이전글모든 소리가 사라졌던 겨울 저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