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소리가 사라졌던 겨울 저녁

단 한번이었던 무소음의 순간

by 이진호

내 외가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이었다.


지금은 교통편도 좋아지고 전원주택이 들어선 곳이지만, 내가 어렸을 때는 제대로 시골이었다. 아궁이에 밥을 하고 외양간마다 누런 소를 키웠다. 서로 멀찍이 떨어져 있는 집들은 흙길로 이어져 있었고, 마을의 유일한 교통수단인 버스는 하루에 두 번밖에 다니지 않았다. 황순원의 소나기, 딱 그 배경 같은 곳이었다.


방학이 되면 형과 나는 그런 외할머니 댁에서 며칠씩 지냈다. 여름과 겨울의 풍경은 전혀 달랐고, 노는 방식도 자연스럽게 달라졌다. 이 이야기는 겨울에 있었던 일이다.


양평은 유난히 추운 동네였다. 일기예보에서 영하 27도라는 숫자를 보고도 밖에 나가 놀았고, 그때 콧물이 얼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눈도 많이 왔다. 겨울 내내 온 세상이 눈으로 덮여 있었다. 그래도 눈싸움을 하거나 눈사람을 만든 기억은 거의 없다. 너무 추워서 눈은 모래처럼 흩어질 뿐, 뭉쳐지지 않았다.


어느 날, 친구 집에서 놀러 갔다가 해 질 무렵이 되어 외할머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친구 집은 꽤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나는 눈길을 혼자 걸었다. 집집마다 굴뚝에는 저녁을 준비하는 연기가 피어났다.


구름은 낮게 깔려 있었고 바람 한점 없었다. 해는 이미 산 너머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둡지는 않았다. 온통 하얀 눈 세상이라 오히려 훤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혼자 걷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밟을 때 나는 뽀드득거리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마치 세상에 유일한 소리마저 사라졌다. 숨소리까지 죽이자, 정말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상 전체에서 소리가 빠져나간 것 같았다.


어린 나이였지만, 나는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흔하지 않고, 앞으로도 다시 겪기 어려울 거라는 것을. 원래도 조용한 동네였지만, 소복이 쌓인 눈이 남아 있던 작은 소리들마저 모두 흡수한 결과였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소리가 없는 세상을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뒤쪽에서 눈을 급히 밟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보니, 함께 놀던 친구가 넉가래를 들고 오고 있었다. 우리 키보다도 큰 넉가래를 어깨에 걸친 모습이었다.


“왜 따라왔어?”


친구는 서울 촌놈이 눈길 걷기 힘들 것 같아서 눈을 치워주러 왔다고 했다. 그 맘이 고마웠다. 소리 하나 없는 겨울 풍경 속에서, 그 친구의 마음 씀씀이가 따뜻했다.


그날 이후로 완전히 아무 소리도 없는 순간은 다시 경험하지 못했다. 아무리 조용한 곳에 있어도, 귀를 기울이면 멀리서 차가 지나가는 소리나 어디선가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들린다. 지금에 와서 가장 비슷한 경험이라면, 건강검진에서 청력검사를 받을 때쯤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곧 ‘삐’ 소리로 깨지고 만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소리가 사라졌던 그 겨울 저녁은 지금까지도 소중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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