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동이 이야기
어제 우리 지동이가 친구의 비밀을 들었다고 했는데 에미가 비밀로 할테니 알려달라고 해서 나도 비밀을 알게 됐다. 듣고 나니 요상했다. 그게 아홉살 아이의 비밀일 수 있는가, 어린 아이니까 가능한 비밀인가 그러저러한 생각이 든 것이다. 듣자하니 친구에게는 비밀로 하는 이유가 있었는데, 그 비밀을 다른 친구들이 알게 될 때 놀림거리가 되지 않을까 여멸하고 있었다. 그건 놀림당할 일이 아니고, 누구나 그럴 수 있는 거라고 말해줬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내가 친구의 비밀을 너무 가벼이 여긴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아침에 빵을 먹으면서 어제 엄마한테 말해준 친구 비밀은, 비밀이니까 너는 지켜줘야 한다고 했다.
지동 : 엄마가 아빠한테 말해버린거 아니지?
에미 : 안말했어 아직. 안말할게~
사실은 어제 남편이 먼저 잠들지 않았으면 같이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다행이다.
그렇게 비밀공유, 비밀유지의 의리를 지킨 지동이에게 오늘 아침 무섭게 굴었다. 병원에서 비타민 캔디를 하나 주셨는데 약을 먹고 바로 먹자고 말했건만 약을 섞고 있는 중에 입에 넣어서 아그작 씹고 있는 걸 보고 화가 나버렸다. 근데 여러번 생각해도 오늘의 나이기때문에 화를 낸 것 같다는 결론이다. 평소의 원칙과 훈육 기준이 아니라 그저 '오늘의 나' 때문. 지동이에게 미안한 마음을 '미안해'로 정리할 수 없을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않게 자수를 놓고 있지 못할 것 같아서 오늘 약속된 일정을 접고 운동부터 하고 왔다. 이 흐름을 멈추고 돌려 세우지 않으면 그 시간 이후에 또 무슨 경험을 하게 될지 무서웠다.
'오늘의 나'는 그럼 어떤 나이며, 왜 그런 나가 되었을까를 조용히 생각했다. 달리 이벤트가 없었기 때문에 딱 짚어지는 건 없는데 아무래도 나의 어떤 면들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지동이랑 아침에 병원에 다녀오기로 갑자기 정해지면서 느슨했던 아침시간이 조금 바빠졌다. 그건 누구의 탓도 아니지만 바빠짐으로써 두드러지는건 내가 게으르게 굴어서 해내지 못한 구멍난 집안일. '구멍나지 않게 잘 해둬야겠다'는 결론으로 '오늘의 나'를 일단락지었다. 이제 우리 지동이의 기분이 남았다.
평소 에미애비가 하는 말을 가벼이 듣기도 하고 진지하게 듣기도 하는 아이한테 도대체 너가 진지하게 듣는 말이 뭐냐고 다그쳤다. 게임? 게임이지! 이러면서 뜬금없이 게임좋아하는 아이를 소환했다. 말하면서도 내가 미쳤네 싶었다. 이렇게까지 갈 일인가. 그냥 비타민 먼저 먹었으면 어쩔 수 없다, 약이 써도 그냥 먹자! 하면 될일을 말 안통하는 아가도 아니고, 의사표현 분명하고 소통에 문제없는 아이한테 악다구니를 썼다. '오늘의 나'야 정말 나조차도 감당이 안되는 나야, 아침에 일어나 기도라도 하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