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사람
나는 오래된 거리처럼 너를 사랑하고>를 읽은 적이 있다. 2023년 12월 아니면 2024년 1월이었을텐데 시인이 그 당시 세계에 속해 있는 사람이라는 또렷한 인식을 얻었다. 산문이라고 하는데 자기만의 이야기에 빠지면 그건 일기, 그 이야기를 보편화 시킬 능력이 있으면 책이 될 수 있다고 믿는 독자 1로서, 시 또한 그렇다. 자기만의 이야기/감상에 빠져 있으면 그건 시로 쓴 일기, 그것이 누구나의 이야기가 될 때 시집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 정도만 되어도 나는 고맙게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시집에서 시인의 눈이 바깥을 향해 있는 것을 느꼈다. 바깥을 응시하다가 쓴 시는 현실의 언어로 쓰였고, 그래서 아리송하지 않았다. 시가 어렵다는 편견이 만연한 것은 지은이라고 해석에 별 수 있을까 싶은 시들이 시에로의 진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딱히 떠오르는 그런 시 경험은 없지만서도.
아무튼 그런 진은영 시인의 이름은 사실 책제목 다음에 발견했다. <나는 세계와 맞지 않지만>이라니. 얘를 빌려올까 말까 살피기 위해 잠시 훑으면서부터 내 얼굴 근육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이 책을 몇번이나 울음을 삼키며 읽었다.
통째로 소중했지만 밑줄 몇개 그었다(태그 몇개 붙였다).
97p. 그는 평범함을 유지하려고 애써왔따. 평범함은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를 유지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 우리가 그상태를 지키기 위해 인생의 한순간도 교활하거나 타협하거나 아첨하지 않았다고 자신할 수는 없지만, 그런 순간을 조금이라도 피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음을, 그는 우리 보통 사람들을 대표하여 발언한다. 그래서 그가 왜 내가 항상 피로와 불안과 고통을 느끼는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도대체 나는 언제쯤 쉴 권리를 가지게 되는 거냐고 질문할 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우리도 그 답이 가장 궁금하기 때문이다.
127p. 신성해진다는 것은 다른 존재를 위해 사랑을 흘러넘치게 표현하는 일인 동시에 타자를 위해 풀러서며 자신을 한껏 움츠리는 일이다.
현대인들은 두 번째 태도를 가직고 더울 어렵다. 피에르 자위의 말처럼 "모든 세계가 눈에 띄는 것이 곧 존재하는 것이라고 끊임없이 상기시키는데 어떻게 이 와중에 있는 듯 없는 듯 처신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선전은 확실히 현대적 현상이다.
130p.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일을 멈추는 것 역시 물러서기, 드러내지 않기의 미학이다. 그것은 튀면 욕먹는다는 비겁한 처세주의와 다르다. 또 사는 동안 영원히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인간은 드러내기와 드러내지 않기의 자유로운 운동 속에서 살아갈 때에만 아름다울 수 있다.
143p. 인간은 실패하려고 태어난 '훼손된 피조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카뮈 덕분에, 우리는 어려운 싸움을 계속 이어가는 이들을 어리석다고 말하는 대신 위대한 용기를 가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우리가 진정 사랑하는 이들은 승리하는 이들이 아니라 진실과 인간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어쩌면 패배할지도 모를 싸움을 시작하는 이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서평집이다. 신문에 기고했던 글들을 모은 것 같은데 신문을 챙겨보지 않는, 우연히라도 볼 일 없는 나는 미처 몰랐다. 서평집에 대해 나는 기본적으로 '꿈보다 해몽'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으나 정말 그런지 아닌지 알아보고 싶은 탐나는 작품들이 시인의 언어로 소개된다.
모처럼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어서 행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