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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원 Jun 08. 2022

퇴사 1일 차 일기 :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 백수

오늘 아침엔 일찍 일어나 집 앞에 있는 산에 올라가리라 다짐했는데, 눈을 뜨니 9시다. 점심 약속이 있어 산에 다녀오기엔 시간이 빠듯할 것 같다. 집 앞에 있는 실내 테니스장에 가서 20분 정도 볼머신을 쳤다. 어제 처음으로 야외 코트를 예약해서 다녀왔는데 역시 연습과 실전은 완전히 달랐다. 레슨하며 배웠던 아름다운 스윙들도 막상 코트에 나가 랠리를 하려고 하니 공을 넘기는데 급급했다. 볼머신을 치면서 다시 자세를 바로잡고 잘못된 점들은 고쳐보려고 노력했다.


시간 계산을 잘못했다. 11시 30분까지 삼성동으로 가야 하는데 벌써 10시 10분이다. 대중교통으로 가면 늦는다. 택시를 탔다(!) 개인택시 기사님이 아주 점잖으셨다. 나는 택시 기사님과 수다 떠는 걸 좋아한다. (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요즘 삼성동에 일하는 직장인들 중에는 회사에서 출근 택시비를 지원해주는 곳도 많다고 한다. 그래서 나 보고도 혹시 출근하는 중이냐고 하셨다. 그냥 점심 먹으러 가는 중입니다..! 여의도 재건축과 기부채납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삼성동에 도착했다. 아, 출퇴근 시간대를 피해 택시를 타고 이 동네에 오니 이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구나.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식당 카운터 앞에 앉아 기다렸다.

점심은 삼성동 팀호완에서


예전 직장 동료 두 명을 만나러 왔다. 같이 일한 시간이 5년 가까이 되는 동료들이다. 오랜만에 만나니 정말 반가웠다. 예전 회사가 돌아가는 근황도 듣고, 앞으로 내가 가게 될 회사에 대한 이야기도 했다. 결혼 생활, 건강 검진, 육아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수박주스를 한잔씩 마신 뒤 두 명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다. 나도 예전 회사의 분위기를 좀 느껴보고 싶어서 1층 로비까지 데려다주었다. 여전하구나 여기는. 약간의 아련함과 몽글몽글한 마음을 안고 다시 길을 나섰다.


강남에 나온 김에 백화점에 갈까 하다가 딱히 보고 싶은 것도, 사고 싶은 것도 없다. 애플워치 밴드나 볼까 하고 애플스토어 가로수길에 갔다. 삼성동에서 강남 08번 버스를 타면 가로수길까지 간다. 꽤 가까운 거리인데, 퇴근시간에는 40~50분씩 걸리기도 한다. 가로수길에서 저녁 약속이 있을 때 이 버스를 탔다가 도로에 갇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오후 1시의 도로 상황은 아주 원활이다. 미리 애플스토어 방문 예약을 하고 갔다. 일체형으로 된 밴드를 구입하기 위해 손목 사이즈를 재고, 약 20분의 상담 끝에 마음에 드는 제품을 골랐다. 직원이 창고에 가서 제품을 가져와서 결제를 하려고 삼성페이를 꺼냈는데..! "보안 상의 이유로 삼성페이 결제는 불가합니다. 실물 카드 없으신지요?" 두둥.. 특별한 날이 아니면 실물 카드는 잘 안 들고 다니는데.. 결국 아무것도 사지 못하고 나왔다. 생각해보면 딱히 엄청 사고 싶었던 것 같지도 않다.


경기도민으로서 서울 나온 김에 모든 일을 해결하고 가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던 찰나, 신사역과 같은 3호선 라인에 괜찮은 테니스 용품점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지하철을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규모가 상당히 크고 옷도 많았고, 피팅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테니스 치마도 여러 종류가 있어서 입어보았는데 좀 부담스러워서 사진 않았다. 필라에서 나온 티셔츠를 내 것과 남편 것 한벌 씩 샀다. 학생들 체육복 같은 스타일인데 귀여워 보였다. 내가 방문한 이유는 헤드 투어 팀 백팩 민트색을 사기 위해서였는데, 핑크밖에 없었다 ㅠㅠ 우선 핑크라도 메봤는데 크기도 적당하고 디자인도 예뻤다. 민트색은 해당 점포에 입고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들어오지 않을 것 같다 한다.


굳이 그 가방을 사려했던 이유는, 새로 산 라켓과의 깔맞춤을 위해서다. 지난주 라켓을 드디어 샀다. 헤드의 붐 팀 라켓(275g)이다. 원래 쓰던 라켓은 3년쯤에 전에 아빠가 사준 윌슨의 N3 라켓(250g)이다. 시니어와 생초보들이 쓰기 좋은 라켓이라는데, 어쩌다 보니 너무 오래 썼다. 무게가 가볍고 라켓 헤드가 커서 공을 맞추기 쉽다. 다만 무게가 너무 가볍다 보니 공에 힘이 잘 실리지 않아서, 조금 더 무거운 라켓으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과 25g 차이지만 막상 쳐보면 그 차이가 꽤 크게 느껴진다. 처음에는 공도 잘 맞지 않고 손목에도 무리가 갔는데, 이제는 조금씩 적응하는 중.


헤드 붐 팀 라켓 (275g)


하여튼 그 민트 라켓과 함께 세트로 나온 백팩을 구하기 위해서 과장 조금 보태어 전국을 수배 중인데 쉽지가 않다. 애초에 국내에 물량이 많지 풀리지 않은 모양이다. 중고 시장에 간간이 나오지만 바로 거래되어 버린다. 지금도 해외직구로는 살 수 있는데 국내 정발가보다 훨씬 비싼 가격이다. 깔맞춤 하겠다고 굳이 그 돈 주고 백팩을 사고 싶지는 않다. 우선 구입은 보류.


요즘 나와 남편은 테니스에 완전 미쳐있다. 지난달부터 일주일에 두 번씩 레슨을 시작했는데, 나는 틈나면 레슨이 없는 날에도 나가서 볼머신을 친다. 집 앞에 있는 작은 족구장 같은 데서 둘이 랠리를 하기도 한다. (그런 걸 랠리라고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결혼하기 전인 6년 전에 3개월 정도 레슨을 받다가 이사를 하면서 그만두었고, 3년쯤 다른 곳에서 남편과 함께 레슨을 받다 또 이사를 하면서 그만두었다. 그렇게 쉬다가 이번에 다시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실내 테니스장도 많이 생겼고, 젊은 층 사이에서 테니스가 인기 있는 스포츠로 떠오르며 유튜브에도 영상들이 엄청 많아졌다. (그때 시작했어야 하는 건데.)


얘기가 자꾸 딴 데로 새는데, 어쨌든 그래서 테니스 용품점에서 티셔츠 2장과 귀여운 댐퍼(라켓에 착용하는 액세서리), 양말 3벌을 사서 사당역으로 향했다. 사당역 감자옹심이 집에서 보쌈 정식을 급하게 먹고 광역버스를 타고 집으로 왔다. 연휴 다음 날이라 그런지 아직 본격적인 퇴근 시간이 안 되었는데도 차가 엄청 막혔다. 집 근처 네일숍에서 패디큐어를 하고, 오빠네 집으로 가서 가족회의를 했다. 얼마 후에 있을 엄마 생일파티를 위한 준비. 새언니가 바밤바 막걸리 2캔을 챙겨주셔서 입에 와서 호로록 마셨다. 아이스크림 바밤바 맛이랑 똑같은데 은근히 알코올 기운이 올라오기는 한다. 막걸리를 마신 지 얼마 되지 않아 픽 하고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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