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산에 갈 수 있을 것 같다.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어제 테니스 용품점에서 산 노란색 나이키 양말을 신었다. 선크림을 꼼꼼히 바르고 모자까지 착용 완료. 얼마 전 1L 커피를 구입하고 받은 플라스틱 병에 얼음과 찬물을 담고, 정상에서 먹을 곤약젤리를 하나 챙겼다. 작년에 당근에서 산 등산가방에 짐을 담았다. 소지품은 얼마 안 되지만 들고 다니는 건 번거롭다. 백팩을 메고 허리에 고정까지 해주면 준비 완료. 드라이할 옷도 4벌 챙겨서 8시 30분에 집에서 나섰다.
그런데 이게 웬걸, 세탁소가 9시부터 영업 개시다. 몇 개월 전만해도 아침 7시에도 문이 열려 있었는데.. 아무튼 드라이할 옷을 가방에 들고 다닐 수도 없고, 다시 집에 돌아갈 수도 없어서 문을 열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마침 세탁소 근처에 24시 무인카페가 있어서 거기에 있기로 했다. 공복이니 '연한 아메리카노'로 주문. 결제를 완료하고 컵까지 나왔는데, 아무리 눌러도 얼음이 안 나온다. 찬찬히 살펴보니 아메리카노가 hot과 ice로 나뉘어 있었구나.. 여름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라니. 다행히 집에서 챙겨 온 1L 얼음물이 떠올랐다. 그래서 커피머신에서 나오는 뜨거운 물은 안 받고, 에스프레소가 추출되는 것만 받았다. 그런 다음 얼음물에 에스프레소 1샷을 부었다. 오, 아이스 아메리카노 완성.
기다리는 동안 온라인 쇼핑을 했다. 재고가 소진된 마스크도 사고, 안다르 1+1 레깅스도 샀다. 레깅스가 도착하면 테니스 칠 때도 입고, 등산 갈 때도 입어야지. 이것저것 구경하다 보니 금세 9시가 되었다. 니트가디건 2벌과 와이드팬츠 1벌, 원피스 1벌 드라이를 맡겼다. 와이드팬츠는 단추도 달아달라고 했다. 세탁소에 옷들을 맡기고 나면 무척이나 홀가분하다. 깨끗하고 반듯하게 다려진 옷들이 우리 집 현관문 고리에 도착해 있을 거다.
체력을 안배하기 위해 산 입구까지 버스를 타고 가기로 했다. 1.5km 정도 되는데, 못 걸을 거리는 아니지만 가는 길이 좋은 편도 아니고 시간을 뺏기는 것 같아서. 등산로 초입에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였다. 여름에 오전 9시는 등산하기에 좀 애매한 시각인 것 같다. 매일 산에 다니는 어르신들은 이미 하산을 마친 시각이고, 나같이 늦잠 잔 젊은이들이나 산에 가는 시간이 아닐까. 사람이 별로 없어서 좋았다. 조용하고 한적했다. 너무 오랜만에 산에 오니 조금만 올라도 숨이 찼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산에 왔을 때보다 좋은 점은 마스크를 쓰지 않고 오를 수 있다는 것! 이 하나만으로도 한결 나았다.
해발 300미터짜리 산이라 평소 50분 정도면 올라갔는데, 오늘은 70분 정도 걸렸다. 등산 대회에 나간 것이 아니라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간 것이니 무리하지 말고 내 페이스대로 가자고 다짐했다. 정상 근처에는 보물로 등록된 마애보살입상이 있는데, 거기에 들러 기도도 한 번 했다. 올라갈 때는 오래 걸렸지만 내려올 땐 순식간이다. 속세의 번뇌와 쓸데없는 잡념들은 모두 산 정상에 털어버리고 가뿐한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홀가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