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정말로 어른이 됐다니까요

by 일곱시의 베이글


1. 비쩍 마른 편이었다. 발육이 빠른 친구들은 브래지어를 했지만 난 아직이었다. 가슴 나온 우리 학교에 누구는 스포츠브라를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친구를 잘은 몰랐지만 뭔가 멋져 보였다. 어른이 된 것처럼 보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가. 가슴에 덩어리 같은 게 잡혔다. 덜컥 겁부터 났다. 집에 달려와 엄마한테 얘기했다. 엄마는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다. 아빠의 표정은 좀 묘했던 것 같다. 옷을 입으면 가슴이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어깨를 움츠리고 다녔다. 막내이모는 내게 그럴 필요가 없다고 했다. 가슴을 똑바로 펴고 다니라고. 그래도 된다고. 고개를 끄덕거렸지만 막상 그게 쉽지 않았다. 내 몸에 나타나는 변화가 어색했다.



2. 몇몇 친구들은 초경을 시작했다. 나는 아직이었다. 정체가 무언지 궁금했다. 안방 옷장을 보니 엄마 생리대가 있었다. 신기했다. 이런 거구나. 지금 생각하면 지겹게도 많이 할 것을 미리부터 궁금해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지만 그때의 난 호기심이 가득했다. 내 친구들은 한다는데 왜 난 아직일까, 언제쯤 시작하는 걸까. 그러고 나서 일 년쯤 지났을까, 나도 초경을 했다.



3. 아마도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만화책과 소설책을 읽으며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특히 소설에 오는 기자들이 멋져 보였다. 구체적인 꿈을 품었던 건 아니지만 나도 그런 어른이 되고 싶다 생각했다. 엄마 옷장에 있는 정장을 꺼내 입고 전신거울 앞에 섰다. 하이힐도 신었다. 거울 속의 나는 낯설지만 신기했다. 연기도 좀 해 봤다. “어머, 여보 왔어? 오늘은 너무 회사 일이 힘들었어” 뾰족구두를 신고 정장을 입는 커리어우먼이 되고 싶었다.



4. 7cm짜리 구두를 샀다. 삐그덕거리며 걷다 보니 앞선 생각들이 스쳤다. 혹시 오늘의 내가, 과거의 내가 꿈꿨던 바로 그 모습은 아닐까 하는.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직장인 여성이 되었고, 오늘 난 정장 비슷한 옷을 입고 있었고, 구두도 신었다. 그때의 내가 상상하기로는 당연히 결혼도 했을 나이가 됐다. (그당시의 내게 '30살이 될 때까지 결혼을 안 했을 것'이라고 말하면 까무러치게 놀랄 거다) 정말로 어른이 됐다. 대학을 갓 졸업했을 땐 어른 흉내를 내고 있단 생각을 했다. 역할놀이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그런데 직장생활을 시작한 지도 6년 차다. 역할 놀이라기엔 좀 길어진 것 같다. 놀이인 줄 알았던 일이 정말 내 인생으로 자리를 잡았다. 분명 남들이 말하는 어른이 된 것 같다.



5. 대학교 4학년 때 과외했던 동생을 만났다.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재수생이었던 그 아이는 취업준비생이 돼 있었다. 26살인 그 아이는 공무원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노량진에 간다고 했다. 나는 그 아이 인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그렇게 열심히 살지는 말라는 주제넘은 조언을 했다. 나는 그렇게 치열하게 살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 아이는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고 했다. 뭔가 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아직 잘 모르겠으니 일단 공무원이 돼서 여행도 다니고, 하고픈 일을 자유롭게 하고 싶다 했다.


나는 그 아이에게 물었다. 나중에 나이 먹으면 뭘 하고 싶니. 운동을 좋아한다는 그 아이는, 나중에 오십 쯤 되면 동네에 체육관을 차려서 운동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좋아서 하는 그런 일을. 왜 지금 그리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아직은 아니라 했다. 질문을 던져놓고 스스로에게도 물었다. 오십 살의 나는 무얼 하고 있을까. 망설임 없이 답할 수 있었다. 그때도 난 무언갈 쓰고 있을 거라는. 뭐가 됐든.



6. 생각보다 답은 간단하지 않나 싶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그렇지만 무엇도 확신할 수는 없다. 어른이라는 게 완성형 단어는 아니니까. 그저 이렇게 생각날 때마다 쓰다 보면 뭐라도 되겠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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