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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치료사 이원지 Jul 12. 2023

정말, 나란 여자.

"잃어버린 무언가를 찾는 행위"에 부어버린 약 4380시간.

'230710


오늘은 꼭, 논문 수정본을 보내야했다.

미루고 또 미루고 또 미뤄왔던 것은 더 이상 미룰 공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어쩜 나란 여자는 이토록 묵직-하게 불편한 마음을 저변에 깔고도 그토록 애써 외면하며 미루고 또 미루는지.

(대강 결론은 나왔다. 나는 회피형인데다가, 완벽주의 성향이 있어 한번 잡으면 제대로 해내야하기 때문에 일절 쳐다보기가 싫은 것.)


마감이 다가올수록, 즉 무언가를 보내야한다는 강박에 시달릴수록 신기하게도 해야할 일이 많아진다. 불편감을 가지고 외면하며 팡팡 놀 때에는 베짱이 역할이 가능한데, 이제 긴박해지기 시작하면 몰려오는거다.

그 일들의 사이를 쪼개어 나름 수정본을 다듬었으나 아직은 내 기준에서 죄금 모자라 더 보고 또 보는 중.


하여 월요일 오전이 된 것. 그래, 오늘이다. 오늘 오전이다. 저-기 스터디카페 4시간권을 끊어야겠다. 당찬 마음을 입고 대강 로션만 펴바른뒤 모자를 눌러쓰고 나가려는 찰나,


어머나. 노트북이 없네.

.

.

어, 왜 없지? 어제 분명히 차에도 없었는데. 어디..에 있지? 헉, 어제 교회에 두고왔나보다.


노트북 한번 열어볼 시간도 없으면서 괜히 불안함에 들고 갔다 역시나 아-무 작업도 하지 않고 그냥 두고온 것. 한번이라도 펴봤으면 조금이라도 덜 억울했을걸.

하. 시간은 오전 8시 50분. 날은 월요일. 날씨는 비오고. 하남에서 용산까지 비오는 월요일 아침이라니 말 다했다. 그래도 어떡해. 노트북이 없으면 작업을 할 수가 없는걸. 오늘 보내야하는걸.

혼자 와악. 낮은 괴성 한번 지르고 (이럴때 시원하게 욕을 할 줄 아는 위인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주섬주섬 차키와 지갑, 핸드폰을 챙겨 엘레베이터를 호출한다. 정신없는 와중에 믹스커피 한잔이 또 생각나네. 하하. 뭐 빠르게 돌돌 타 종이컵에 옮겨담고 세상 추레한 모습으로 지하 2층으로.


산지 한 9년 되었나. 세상에서 제일 편하나 밑창이 다 닳아버린 나의 촌시런 여름 갈색 크록스를 끌고 가는데 아이고야. 주차장 바닥에 물이 고여있었네. 이 큰 몸으로 나홀로 민망한 춤사위를 펼치는데 아뿔싸 믹스커피도 함께 튀어오른다. 다행히 커다란 상체를 뒤로 멋스럽게 제껴 옷에 튀지는 않았어.


자 이제 드디어 차에 탑승. 피식대학 빈지노 편을 틀어놓고 가야겠다. 시동을 켜고 출발하려는데.

.

.

안경이 없네.

 

무심하게 차에 타서 시동을 걸고 가방을 뒤적거리는데 으아 없다. 또 하필이면 이 가방 수납공간도 많지. 하나하나 다 손을 넣어보고 휴대폰 손전등 켜서 이곳저곳 살펴보았으나 없어, 집에 두고 왔나보아.

차에서 나와 집으로 올라가는 길. 난 정말, 차에만 두고 다니는 안경을 하나 더 맞춰야 해. 이게 뭐야. 안경점에 가야겠어. 이번엔 어떤 테로 해야하지. 


16층. 디디디릭. 비밀번호 누르고 들어가 안경을 두었을법한 곳을 뒤지는데, 어. 어라. 없어. 없다. 안경이, 안경이.. 없다. 세수하고 놔두었나. 화장실에도 없고. 아이들 방 화장대에도 없고. 안방에도. 침대 맡에도. 혹시나 역시나 서랍들도 제껴보는데도. 없다.


이거 뭐야. 아니 아까 가방에 넣었었나? 근데 왜 못찾았지. 아무래도 가방에 있나봐. 다시 지하2층으로 내려나는 엘레베이터 안. 이쯤되면 정말이지 내가 미워지기 시작한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가방에 손을 수욱 집어넣는데,

어어

안경이 있다.


방금 전까지 없었잖아. 내가 가방 모조리 다 뒤졌잖아. 왜 여기 이렇게 안정적으로 있는건데.


하.....................

그렇게 저렇게 그 꾸물한 날을 뚫고 용산까지 다녀왔.


아, 정말 나란 여자.

잊고 나오고, 다시 찾으러 가고, 잃어버리고, 다시 찾는데

39년의 시간 중 얼만큼의 시간을 사용한걸까.

못해도 아마 모조리 다 합쳐 주욱 나열하면 6개월정도, 즉 4380시간 정도는 될 것 같으다.


으아.

이토록 잃어버릴때는 자기혐오가 또 우광광 올라오지만

초콤 지나면 자기혐오 또한 재빠르게 "잃어버려져서" 다행이야.

난 어차피 아무리 노력해도 고칠 수 없으니

이런 나와 살아주는 홍천이 아인이 수아에게 고마워할밖에.

따스한 결론으로 마 무 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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