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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치료사 이원지 Aug 12. 2024

어줍짢고 얄팍한 동정심은,

이젠 그만두려고요. 

'240809. 


오랜만에 지하철을 탔다. 


7호선으로 대학교를 오고가던 4년 내내, 이동하는 환승 역내 구간에서 비릿하고 흥건하게 풍겨오던 냄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으니, 그건 할머니들이 앉아서 손질하여 내다 파시는 도라지같기도, 고구마순같기도 한, 정체모를 무언가였다. 바삐 오가던 청년 시절, 그러한 물건이 필요할 리 만무하나, 그 옆을 훽 지나치기엔 괜한 미안함이 올라오곤 했다. 


그와 유사한 냄새가 났다. 또 같은 구간이었다. 오랜만에 맡아버린 그것에서 나의 예민한 후각은 옛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돌아보니, 역시나 할머니가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손질하신다. 오늘따라 지갑 속 고이 간직해둔 2만원, 거기다 나는 십오년 전보다 형편이 낫지 않은가. 내게 당연히 필요한건 아니겠으나, 나름의 선한 결심을 짧게 마치고, 저벅저벅 할머니에게로 걸어갔다. 스윽 훑어보니 또 정체모를 고구마줄기같은 것과, 청계(푸른 달걀) 10개들이 판이 3구 정도 놓여져있다. 그나마 계란은 늘 떨어지지 않도록 쟁여놓는 편이니, 계란을 사야겠단 생각과 함께 이쁘고 나즈막하며 상냥한 목소리로 가격을 여쭈면서 할머니와 눈을 맞췄다.


이때부터였다. 내 상상 속 레퍼토리와 다르게 흘러가는 그림들.

쪼그리고 앉아 쉴새없이 다듬던 손을 잠시 멈춘 채 나를 쳐다보는 할머니의 눈동자는 뭐랄까, 쎄한 느낌이었다. 스카프로 가린 이마 사이로 비쳐지는 새-까만 머리카락은 냉랭하고 어색했다. 

"만원이에요. 드려요?"

만원이면 날알 하나 1000원. 

"아-네 주세요."  

할머니는 배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꼬깃한 파랑색 얇은 봉투를 꺼냈고, 그 안에 계란을 담아주었는데, 재빠르게 담아내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혹시나 내게서 어떤 질문도 떨어지기 전에 건네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듯 보였다. 혹은 판매성공으로 이어지기까지가 너무 오랜만이어서 얼결이었거나. 결국 나는 계란을 받아들고 작은 목소리로 "감사합니다"를 말하고선, 환승구간으로 걸어갔다. 


음. 기분이 별로였다.

할머니의 냉랭함도, 그 쎄한 눈빛도, 내가 상상해왔던 따스한 풍경이 전혀 아닌것도, 동정과 적선의 결과로써 으레 따라오는 은근한 뿌듯함을 느끼지 못한 것도, 결국은 그 비뚤어진 선함(나는 돕는 입장에 있으니 도움을 받는 너보다는 낫다)을 채우려고 그런 다짐을 가졌다는것도, 그 마음이 채워지지 못했다고 기분이 별로인 나를 직시하는 것도, 그냥 모두가 다 별로였다.


그리고선 이제 와서 퍼런 봉투 속 담겨져있는 10개의 계란을 생각해보니, 어맛 이건 알의 유통기한도 모르고, 알이 세상에 언제 나왔는지도 모르고,  하자가 발견된다한들 AS를 받으러 올 수도 없는, 기묘한 무언가를 아주 비싸게 사버린 셈인 것. 이런 계산이 머릿속에 돌아가고 있는 나를 보고있으니 그야말로 나도 할머니도 계란도 상황도 모조리 다 짜치구나. 


만약 할머니의 표정에 미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아이고, 젊은이. 이 불쌍한 늙은이를 향해 동정을 품어주니 고맙네요. 이건 청계인데, 내가 키운 닭이 얼마전에 낳은거라 신선해요. 이 한마디 붙여줬으면 어땠을까? 

분명 지금처럼 찜찜하며 모든것이 다 짜치는 이런 기분은 아니었을것이다. 확실하다. 설령 그 계란의 신선도 운운이 거짓이었다 해도. 내가 눈으로 계란의 퍼진 상태를 확인했을지라도 지금의 그것과 같진 않았을테지.


그렇다면 결국 순수한 적선, 순수하게 돕는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걸까?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돕는다고 해도, 분명 도움을 받는 사람의 제스츄어가 필요한 것이 현실이다. NGO기관에서 후원자와 아프리카 아동의 연결 뒤엔 얼마나 많은 복지사들의 업무가 따라오는가. 아동은 때에 맞춰 사진과 편지를 내어주어야하고 결국 기관은 후원자의  "뿌듯함"을 채워줘야만 한다. 그것이야말로 제일 중요한 업무이자 장엄한 사명이겠지. 


나는 청계 10알에서 나의 얄팍한 동정심을 직시해버렸다.

그리고 그 마음에 훅 하고 질려버렸다. 

이웃을 돕는것을 평생 나의 삶의 방향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으나 나를 똑바로 보면 볼수록 나는 그럴만한 위인이 못된다는 것을 깨닫고 또 깨닫는다. 앞자리가 네번째 바뀌는 해를 맞이하니 내가 진솔하게 보아진다. 

어줍짢고 얄팍한 동정심은 나에게도 상대방에게도 도움이 아닌 것을 알았으니,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하는걸까. 아직 모르는 답 앞에 일단은, 나를 솔직하게 두기로 한다. 더 똑바로 나를 봐보자. 생각보다 나는 더욱 악바리에다 못되 쳐먹었을지도 모를 일.


아직 나는 무서워서 계란을 톡 까보지 못했다. 계란에서 핏물이 나오면 어떡하지. 노른자가 그냥 맥없이 풀어지면 어쩌지. 


하하. 나는 이런 사람. 

이럴바에야 마음이나 먹지 말자구. 

마음이 순도 높은 진짜될날이 올까. 

오기 전엔 어떤 과정들을 거치게 될까.

안의 마음과 밖의 마음이 같아져 자연스러운 내가 되기까지 

나는 충분히 못된 나를 보아보고 살아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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