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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치료사 이원지 Aug 22. 2024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달리기_S.E.S

지루한가요. 힘든가요. 숨이 턱까지 찼나요. 
할 수 없죠. 어차피 시작해 버린 것을
쏟아지는 햇살 속에 입이 바싹 말라와도 
할 수 없죠 창피하게 멈춰서 순 없으니
단 한가지 약속은 틀림없이 끝이 있다는 것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달리기_SES]


수험생 또는 입시생 또는 고3이라 이름한 때를 지나던 어느 새벽이었다. 라디오에서 듣고 마음으로 저장해둔 이 노래, 아무도 일어나지 않은 고요한 시간에 몰래 틀어놓고 한쪽 구석에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고3이라는 타이틀 아래 펼쳐지는 생활들은 답답하고 한정적이었다. 짧은 동선만 오고 가는 사이 얼굴도 몸도 퉁퉁해졌다. 내 모습도, 생활도, 미래도, 현재도, 과거까지 모조리 불안했고 두려웠다. 수시전형으로 명문대에 합격한 친구의 밝은 얼굴이 미웠다. 내게 기대하는 가까운 눈빛들과 시선들이 무거워 그 막막함에 허우적대고 있을 때, 노래가 말했다.


끝난 뒤엔 지겨울 만큼 
오랫동안 쉴 수 있다는 것 


수험생에게 이토록 현실적이고 마땅한 위로가 또 있을까. 이렇게 열심히 달리다 보면 핑크 빛 장미로운 현실(예컨대 SKY)을 만나게 될 거야-가 아니어서 좋았다. 그저 이 상황들을 버티다 보면 언젠가 끝이 올 것이고, 그 후엔 지겹고 지겹도록 쉴 수 있을 것이라 말해주어서 고마웠다. 놀라운 사실은 결국 그 끝 날이 오고야 말았다는 것. 


수능 날 저녁. 나는 뒷장에 답을 적어놓은 수험표를 채점하지 않은 채로 힘주어 우아하게 구긴 다음 쓰레기통에 던져 넣는 의식과 함께 끝 날의 기쁨을 만끽하고, 다음날부터 고3생활 내내 적어왔던 To-do List를 실행하며 오래 쉬었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분명 그 날은 올 것임을. 지겹고 지겨우며 지겨울 만큼 쉴 수 있으니 팍팍하고 퍽퍽한 나 너 우리, 조금만 더 힘내어 버텨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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