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봄이를 처음 만났을 때, 자꾸 ‘네 살’이라는 숫자부터 떠올렸다. 네 살이면 강아지로 치면 이미 몇 번의 계절을 건넌 나이였다. 보호받아야 할 시기를 막 벗어난 정도가 아니라, 이미 어떤 삶의 리듬과 기억을 몸에 들인 나이. 그래서 하봄이가 우리 집에 들어오던 날, 나는 반가움보다 먼저 조심스러워졌다. 이 아이는 이미 많은 처음을 혼자서 지나왔을지도 모르니까.
처음 차 소리를 들었을 때, 하봄이는 소리가 들리는 쪽을 피해 벽으로 바짝 붙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을 최대한 작게 접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숨을 크게 쉬지도 않았고, 울음도 없었다. 다만 기다리고 있었다. 소리가 지나가기를, 아니면 자신이 벽의 일부가 되기를. 그 모습은 소리에 맞서 싸우는 몸이 아니라, 소리 속에서 사라지는 법을 먼저 배운 몸 같았다.
산책은 한 달이 걸렸다. 목줄을 채우고 현관문을 열면, 하봄이는 문턱 앞에서 멈췄다. 한 발도 나가지 못한 채 바닥에 배를 붙이고 숨을 얕게 쉬었다. 나는 매일 같은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한 걸음 나가면 그날은 그걸로 끝이었다. 두 걸음이면 충분히 잘한 날이었다. 누군가는 왜 그렇게 유난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그 시간이 훈련이 아니라 연습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봄이가 번식장이 아닌 세상에 익숙해지는 연습.
TV 소리는 또 다른 처음이었다. 우리 집 아이가 보던 건 짱구였는데, 어느 날 화면 가득 짱구 아빠 얼굴이 크게 나오는 장면이었다. 그 순간 하봄이는 화들짝 놀라 현관으로 달려가더니, 신발장에 등을 대고 납작 엎드렸다. 꼬리는 다리 사이로 말려 있었고, 귀는 완전히 접혀 있었다. 마치 보이지 않기만 하면 괜찮아질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아이가 만화를 다 보고 난 뒤 리모컨을 들어 TV를 껐다. 웃음소리가 사라진 거실에서 하봄이는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부르지도 못하고, 안아 올리지도 못한 채,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었다. ‘괜찮아’라는 말이 그날은 너무 가벼워 보였다.
그때 처음 알았다. 어떤 소리는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 기억일 수 있다는 걸. 어떤 얼굴은 만화 속 인물이 아니라,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장면의 그림자일 수도 있다는 걸. 하봄이에게 ‘처음’은 새로움이 아니라 확인에 가까웠다. 이 집은 안전한가, 이 사람은 믿어도 되는가, 이 소리는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네 살이 되어서야 만난 사람으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빨리 바꾸는 게 아니라 천천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다그치지 않는 것, 묻지 않는 것, 잘해보겠다는 욕심을 내려놓는 것. 그렇게 하봄이의 처음은 조금씩 우리의 시간이 되었다.
그래서 하봄이의 처음은 사실 내 처음이기도 했다. 기다리는 법을 처음 배웠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가장 큰 선택일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하봄이가 우리 집 바깥 공기를 처음 들이마시던 날, 나는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늦어도 괜찮아. 시작이 늦으면, 우리가 더 오래 곁에 있으면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