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등지고 업무에 몰두하지 마라.
대기업을 다닐 때, 퇴사하신 선배님들이 항상 하는 말이 있다. 회사가 힘들어 보여도 거기가 좋다고, 나오면 더 힘들다고 말이다. 대기업을 13년 반, 스타트업을 3년 반쯤 다니고, 백수 4개월 차가 되었다. (아직까지는 하던 공부를 마무리하느라고 바빠서 바쁘게 지내고 있다.) 그리고 인생을 돌아보니, 대기업을 다니던 시절은 온실 속의 화초였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도 대기업에 남아있는 후배들을 보면, 고민거리들은 많아도 안정적으로 잘 살고 있다.
2019년 5월 대기업에서 스타트업으로 처음 이직하고 나서 바로 알게 된 것이 있다. '세상이 무척이나 빠르게 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대기업에 남아 있었더라면 세상 변화의 속도를 모른 채로 현실에 안주하면서 살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더 흘러 나이가 더 들고 나서 이 세상에 던져지면,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대기업에서는 안정감을 얻을 수 있지만, 아주 깊은 우물 속에 갇히게 된 개구리가 되는 것 같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높이 도약하지 못해,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상황이 될 수 있다.
대기업을 퇴사하는 시점이 40대를 접어든 차장 직급이었다. 무슨 잘못을 하지 않고서는 뛰쳐나가지 않을 시기였기에, 퇴사를 알리면 십중팔구 '왜? 나가냐?'라는 질문과 '뭐 잘못했어?'라는 표정을 마주했다.
그 당시에 나는 새로운 산업에서 일해보고 싶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는데, 좋은 인연으로 스타트업에 합류할 수 있었기에 과감하게 퇴사를 결심했었다. 대기업에서는 영업적으로도 크게 사고 치지 않고 잘 마무리했던 것 같다. 물론,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내 허물이 보였을 수는 있지만, 나 스스로는 충분히 떳떳할 수 있을 만큼 일은 잘했던 것 같다.
그러고 나서 스타트업을 3년 반 정도 다니고, 다음 거처도 정하지 않고 퇴사를 한 나를 보면, 사람들은 측은한 눈빛으로 '얼마나 힘들었으면?'이라는 질문을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도 나는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3년 반 동안 정말 많이 배웠고, 재미있게 일할 수 있었다. 다만, 내가 나의 소명을 다 하고 있는지에 대해 지속적으로 자문하였고, 그 쓰임이 올해 상반기까지였던 것으로 스스로 정하고 퇴사하게 되었다.
물론 퇴사를 정할 때, 회사가 제시하는 전략에 내가 동의할 수 없어서였고, 그 전략이 나를 더 이상 설레게 하지 않아서였다. 전략은 회사의 경영진이 최종 수립하는 것이고, 전략에 옳고 그름은 없기에 전략 자체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회사가 정한 방향성에 공감하지 못한다면, 내가 떠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공감하지 못하는 전략 하에 일을 하게 되면 불만만 표출하는 직원이 될 수 있으니까 말이다.
대기업에서 일할 때는 내 의견이 전략에 반영될 것이라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았기에, 내 의견과 반하는 전략이 수립되어도 큰 실망이 없었다. (물론 내 의견에 엄청 반하는 전략도 수립되지 않았다.) 그런데 스타트업에 와서는 내 의견을 전략에 반영시킬 수 있다는 기대가 있었던 것이라, 내 의견이 반영되지 않고, 최종 전략이 공감되지 않으니까 상당히 큰 절망감을 느꼈던 것 같다.
스타트업에 경력직으로 나름 객관적인 시선을 갖고 합류해서, 3년 반 동안의 회사를 객관적으로 평가해보면, 스타트업도 스타트업대로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된다는 것이었다. 특히나 성장 가도를 달리던 스타트업은 세상의 변화를 챙길 겨를도, 이유도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스타트업의 BM(business model, 사업 모델)은 원래도 일부 시장(TAM-SAM-SOM framework)을 타깃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최대치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최대치에 도달해가고 있는지는 성장 곡선의 접선의 기울기를 보면, 내부적으로 느끼고 알 수 있다. 그 시점에 필요한 것은 우물 밖 세상이다. 내부의 인력과 아이디어만으로는 그 우물을 빠져나올 수 없다. 누군가 밖에서 끌어줘야 한다.
스타트업이 성장하는 동안에도 세상은 변하고, 시장도 변해있다. 외부적인 요인에 대해 객관적인 분석이 필요한데, 스타트업 내부에서 일을 하다 보면, 바빠서 객관적으로 외부 요인을 분석하기 어렵다. 거기에 더해서 객관적인 분석 결과를 공유해도, 의사결정 시에 감안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당장 쳐내야 할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방향으로 사업을 전개하는 것은 추가 업무가 될 수 있고, 기존의 업무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다고 치부되면, 좋은 사업기회들이 사그라져 없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기회는 대기업이건 스타트업이건 간에 취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기회를 포착하기 위한 폭넓은 시야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금 열심히 일하고 있을 모두에게, 잠시 일을 접고 세상을 한 번 보시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