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자녀교육에 진심인 쌍둥이아빠 양원주입니다.
요즘 아이들이 11시 무렵 자러 가면 같이 들어갑니다. 서로 바쁘고 힘들어서 계속 미뤘던 도란도란 이야기 시간을 조금이라도 가지기 위해서죠.
둥이들이 어린이집을 다니는 무렵에는 제가 대부분 재우며 말을 많이 해줬습니다. 아시다시피 아이들이 방에 들어간다고 바로 잠들지는 않으니까요. 마냥 누워있으면 어른이 먼저 잠들기 일쑤다 보니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인 셈이었죠. 회사에서 있었던 일, 함께 봤던 애니메이션, 옛날이야기 등등 되는대로 다했습니다. 서로 돌아가면서 문장을 이어 붙여가며 새로운 소설을 만드는 놀이도 이때 많이 했었죠.
그러다가 오랜만에 또 이런 시간을 가지니 행복이가 아빠의 옛날 학창 시절 이야기를 듣고 싶다고 하더군요.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좋을지 고민을 하다가 예전 제가 힘들었거나 창피했거나 실수했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서 해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잘 된 이야기보다는 훨씬 효과가 좋으니까요.
그중 하나가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전국 모의고사에서 수학을 8점 받은 경험담이었습니다. 그때는 수리영역 1(수학)의 만점이 80점이었으니 정말 처참한 결과였죠. 그 이후에 정신 차리고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다는 이야기를 해줬을 때 아이들의 반응은 제법 좋았습니다.
똑같은 이야기만 할 수 없었기에 그저께는 또 하나의 흑역사를 방출하게 되었죠. 이제는 둥이들도 좀 컸다고 수위가 약하면 재미없어할 정도의 나이가 되었으니까요. 참고로 지금 펼쳐지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는 30년 전 기억이라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질풍노도의 중학교 2학년 시절입니다. 제가 다니는 경남 진해의 ㅇㅇ중학교는 그 시절 모두 사춘기 학생들이 꿈꾸는 남녀공학이었지만 반을 나눠놓는 아주 잔인한 시스템이었습니다. 인싸도 아니고 아싸도 아닌 애매모호한 위치에 있던 저는 이때쯤 이성에 조금씩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공부도 적당히 하고 오락실도 자주 다니며 학교에서는 차분한 편이었던 평범한 학생이었죠. 여자친구를 사귀는 동급생들이 하나둘씩 눈에 띄자 '어떻게 하면 여자애들과 놀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대뇌의 전두엽을 상당 부분 지배하고 있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요즘 말로 모태솔로였죠. 여담이지만 저는 첫 연애가 대학교 2학년 때입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때마침 저와 초등학교 여자 동창이었던 ㅇㅇㅇ가 우리 학교라는 뒤늦게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친구와는 오다가다 손짓으로 인사 정도만 나누는 사이라고 할 수는 있었죠. 그런데 그 친구를 보고 갑자기 아주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습니다.
이 친구에게 쪽지를 보내서 각자 한 명씩 친구를 데려와 이렇게 넷이서 2 대 2 미팅을 하자고 말해보면 어떻겠냐고 말이죠.
쪽지 내용은 대략 이랬습니다.
ㅇㅇㅇ, 나 양원주인데
시간 되면 ㅇ월 ㅇ일 ㅇㅇ시에 ㅇㅇㅇ에서 만나자.
친구 한 명 데리고 나와.
지금 봐도 경악스럽군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이때는 바꾸고 싶은 지점 중 하나에 들어갑니다.
나름 고급스러운 플러팅이라고 생각하고 시도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던 듯합니다. 이 쪽지를 정성스럽게 접어 여학생들이 있는 반으로 가져갑니다.
그러고는 복도에서 쭈뼛쭈뼛하게 서서 지나가는 여자애를 붙잡고 물었죠. "혹시 여기 ㅇㅇㅇ 있어?"라고 말이죠. 지금은 없다고 하길래 다시 올까 잠시 고민을 하다가 그럴 용기는 없었는지 이 쪽지를 좀 전달해 달라고 하고 도망치듯 그 자리를 빠져나와 버립니다. 그게 두 번째 허튼짓이었죠.
그 뒤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점심시간에 제가 있는 교실로 여자아이들 다섯 명이 몰려왔습니다. 그러고는 묻습니다. "양원주가 누구야?"라고 말이죠. 저를 부르길래 무슨 일인가 싶어서 조심스레 나갔습니다.
그 순간 모든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죠. 그 쪽지의 내용은 그 반 여자애들이 모두 알게 되었고 지금 방문한 대표단이 저를 심사하러 와서 무언의 거절을 전달하러 왔음을 말이죠. 그 여자애들은 저를 보면서 서로 '풉' 하고 웃더니 '왜?'라고 묻는 제게 '아냐'라는 말만 남기고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 아이들은 아마 플러팅을 하기 위한 편지처럼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미숙했던 저는 '내가 여사친이 없어서 그러는데 새로운 친구를 하나 사귈 수 있도록 데리고 와줄 수 있겠니?'라는 의미로 쓴 편지였는데 말이죠. 그것도 넓은 범위의 플러팅이었으려나요? 그리고 지금 이 마당에 그게 뭐가 그리 대수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상황 파악이 어느 정도 된 저는 약속한 날짜에 나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날 이후로 복도에 나갈 때도 꽤 조심스러웠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한편으로는 그 친구에게도 미안한 마음이 있죠. 많이 민망했을 테니까요. 시간이 지나고 대학생 때 그 친구를 우연히 만난 적이 있었는데 그날 일은 미안하게 되었다고 전하기도 했으니 그 사건은 잘 마무리되긴 했어요.
아빠의 학창 시절 겪었던 첫 플러팅 실패담을 듣던 아이들은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어하더군요. 평소에는 잘 쓰지도 않는 표현까지 나왔습니다.
함께 웃으면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맞습니다. 그때의 저는 고민할 필요도 없는 어리바리하고 허술한 녀석이었죠. 아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면 이 정도 망가지는 일 따위 대수겠어요. 그러면서 아이들에게도 당부했습니다. "혹시 좋아하는 아이가 생기면 절대 간섭하지 않을 테니 꼭 아빠와 상의는 하자. 알았지? 너희는 나를 닮았을 테니 아빠처럼 이렇게 이상한 짓을 할 수도 있잖아"라고 말이죠.
한밤중에 즐거운(?) 플러팅 이야기를 나누고 나니 갑자기 고민이 되었습니다. 이 추억을 글로 박제시키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였으니까요. 그러고는 과감히 결정합니다. 아이들 앞에서 한 번 망가졌는데 여기서 한 번 더 망가지면 어떻습니까. 다 지난 일인데요. 이런 추억이라도 있으니 인생은 행복한 게 아니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