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기브 앤 테이크라고 누가누가 말했을까요? 최근 아이들에게 놀라울 정도로 당당한 요구를 들었습니다.
"아빠, 이번 생일에는 저희한테도 이벤트 해주세요."
처음에는 "얘들아 이벤트는 일반적으로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주로 해주는 거란다~ 아들들이 아빠에게 해달라고 하는 게 아니고.."라고 장난스럽게 답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제 생일에 아이들이 해준 이벤트가 생각난 것이죠.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질 않았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정말 치사한 아빠가 될 뻔했습니다.
어차피 저도 그때 기분 좋게 받았고 글로도 자랑을 실컷 했던 데다 이미 받은 것을 무르거나 되돌릴 수도 없는 상황입니다. 저는 흔쾌히 알겠노라고 답했습니다. 엄마는 뭐하시냐고요? 당연히 아이들은 엄마에게도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줘야 한다는 미션을 부여했습니다. 저도 요리를 하지만 엄마한테는 아직 모자라다 보니 이렇게 미션이 분배된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중에서 잡채는 제 몫입니다.
화이트보드에 생일에 대한 내용을 비롯해 메모를 이것저것 해두었습니다. 그중에서 '생일 준비'라는 메모에 아이가 달아놓은 글을 보니 그냥 넘어갔다가는 정말 안 되겠구나 라는 생각이 절로 듭니다.
준비 안 하면 절대로 안 될 것 같은 메시지
가만 보면 아이들은 평소에 떼를 쓰거나 무리한 요구를 한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이번에 보이는 모습이 너무 신기해서 아이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예전에는 그러는 적이 없더니 이번 생일에는 유난히 왜 이렇게 이벤트에 대해서 강조를 하냐고 말이죠. 그 질문에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5학년이 돼서 너무 힘들어서 선물 대신 이걸로 위로를 받고 싶어요."
누가 보면 아이들을 쥐 잡듯이 잡으면서 공부를 시키는 줄 알겠지만 저희 집은 웬만하면 밤 열 시가 넘으면 숙제도 못하게 합니다. 책을 함께 읽은 뒤 바로 재우거든요. 그렇지만 수업 시간도 늘고 숙제도 많아진 데다가 아이들에게도 평소 어른에게 말 못 할 고충이 있을 겁니다.
아.. 말 못 할 고충, 그건 아니구나 우리 애들은 어차피 뭐가 있으면 다 말을 하는구나..
할 말이 많지만 또 침을 삼키며 그 말도 뱃속으로 집어넣습니다.
일단 취지는 알았고 마음의 준비도 되었으니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생각해 보세요. 아이들의 생일파티 이벤트라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방을 화사하게 꾸미고 생일 케이크와 플래카드 이런 것을 붙이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제 머리는 점점 더 블랙홀로 들어가는 느낌이 듭니다.
그 어떤 어려운 원고를 쓸 때보다 머리에 쥐가 많이 나는 듯한 느낌입니다. 그런 데다가 아이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제게묻습니다.
"아빠, 생일 이벤트 준비는 잘 되고 있어요? 아빠가 어떤 걸 해줄지 진짜 떨리고 기대돼요."
얘들은 드라마를 보여준 적도 없는데 무슨 아빠가 해주는 이벤트를 기대하고 설레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입니다. 아들에게 현실은 생각보다 더 냉혹함을 빨리 알려줘야 되는 건가 싶다가도 아이들을 실망시키기는 싫기에 잘 진행되고 있다고 걱정하지 말라며 너스레를 떱니다.
부담감은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집니다. 그러다가 수요일 무렵부터 실마리를 잡고 콘셉트를 정했습니다. 큰 줄기를 잡았으니 세부적인 것은 이제 시간을 써가면서 만들어나가면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콘셉트는 방탈출처럼 순차적으로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식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면 계산기 뒤에 첫 번째 단서가 나옵니다.
이 문제를 풀고 피아노 의자(PIANO CHAIR)로 이동하면
두 번째 단서 등장
스투키 화분에서 세 번째 단서 획득
옷장 주머니에서 네 번째 단서 획득
sofa 가운데 틈새에서 마지막 힌트!!
마침내 피아노에 묶여있는 자물쇠 번호 네 자리를 획득
여기에 오늘의 선물이..!!
가즈아!!!!!!!
레고 가방 안에 들어있는 생일선물은 쿠폰입니다.
학교 하루 안 가기
1시간 게임하기
아빠 화 못내게 하기 등등 몇 가지를 아이들의 니즈에 맞춰서 제 명함 뒤에 적어서 만들어 주었습니다. 돈이 안들어서 좋기는 한데 힘은 엄청 드네요. ^^;;
아이들의 선물, 유효기간이 있는 쿠폰
아이들에게 오늘의 이벤트가 몇 점이냐고 했더니 백 점이라고 하네요. 3일 동안 밤낮을 가리지 않고 머리를 싸맨 보람이 있어서 기분은 좋습니다.
이렇게 아이들은 식전 이벤트를 마치고 푸짐한 저녁을 먹었습니다.
이건 엄마의 작품
손님들과 함께 일단 맛있게 다들 먹긴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번에는 절대 이렇게까지 음식을 만들지 않겠다고 하는 걸로 봐서는 아내도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이 글은 자랑이 아니라 증거를 남기기 위해서 씁니다. 아이들이 자란 뒤에 이렇게 해준 것을 잊어버릴 때 다시 보여주기 위해서죠.
생일파티 한 번 더 했다가는 어른들이 모두 골병이 들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면서 드디어 외칠 수 있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