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둘째와 동네 마트를 갔습니다. 그날 저녁 고기를 구워 먹을 예정이었기에 상추를 사러 간 것이었죠. 상추만 고르고 나오려는 찰나 제 눈에 들어온 싱그러운 야채가 있었으니 바로 부추님이십니다.
최근 들어서 공급이 늘어난 것 같긴 하지만 상추나 부추 같은 신선야채는 9월까지는 마트 매대에서 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응? 우리 동네는 그러지 않았는데?라고 하실 분이 만약에 계시면 저희 동네만 그런 걸로 좀 해주세요.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
그랬던 터라 오랜만에 만난 부추가 반가웠죠. 부추는 제가 아이들에게 훈제오리를 반찬으로 줄 때 애용하는 야채이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시피 훈제오리는 아질산나트륨이 합성첨가물로 포함되어 있기에 저희 집에서는 바로 굽지 않고 뜨거운 증기로 쪄서 요리를 합니다.
보통 부추를 바닥에 깔아서 요리를 해왔는데 부추를 구하기 힘들다 보니 고향에서 보내주신 양파로 그동안 쪄왔던 것입니다. 부추를 보는 순간 저는 본능적으로 바로 집어 들었고 둘째도 제가 왜 부추를 사는지 곧바로 눈치를 챘습니다.
"오리 고기 할 때 쓰려고요?"라고 말이죠.
이제 제법 살림에 대한 센스가 있는 것 같아서 슬슬 혼처를 알아봐도 될 것 같네요.
그런데 부추를 집어 들자마자 큰 문제점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생각보다 양이 너무 많았던 것이죠. 제가 필요했던 양은 어른 손가락 기준으로 엄지손가락과 검지로 만드는 동그라미 모양에 들어갈 정도의 양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집은 부추는 그 양이 다섯 배는 되어 보였습니다. 아내가 격리에서 해제되긴 했지만 온전히 집안일을 할 수 없는 이런 엄중한 상황에서 부추김치나 오이소박이를 만들 정도의 정신은 없기에 오리고기를 할 때만 쓰고 나머지는 버릴 것 같았습니다.
그때 마침!!!!!!
제 눈에 야채 할인코너에 모아둔 상품 중에 부추가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원래 제가 집었던 정상적인 부추 가격은 2,500원이었고 그 할인상품은 1,000원밖에 하지 않았습니다. 사지 않을 이유가 전혀 없었죠. 결국 저는 그 부추를 사서 집으로 왔습니다.
저는 딱 이 정도만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다음 날 아침에 생겼습니다. 절반 정도는 쓸 수 있을 줄 알았던 부추가 생각보다 안에서 많이 녹아있었던 것이죠.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변고였습니다. 아침을 편안하게 준비하려던 제 계획은 순식간에 다급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부랴부랴 부추를 싱크대에 쏟아부은 뒤에 정상적인 것들을 추려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몇 가닥씩 집어 들고 녹아버린 부분을 씻어낸지 10여 분만에 정상적으로 쓸 수 있는 부추들을 선별해냈습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싱크대 배수구 근처는 폭탄을 맞은 듯 엉망이 되었고 제 멘탈도 그처럼 너덜너덜 해짐을 느꼈습니다.
사온 양은 이것의 다섯 배는 넘는 듯
먼저 부추를 냄비 안에 장착한 찜기 위에 올렸습니다. 그런데 하도 부추 냄새를 맡아서인지 부추 녹은 냄새가 씻은 부추에서도 나는 것 같은 것이 아니겠어요.. 그 냄새는 맡아본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리 싱싱한 부추의 향과는 사뭇 다른 유쾌하지 못한 냄새입니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은 찌자!
열심히 찌고 나서도 그런 냄새가 난다면 엄청난 낭패가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습니다. 깨끗하게 씻었다고 생각은 했는데 기분이 찜찜했습니다. 물론 먹을 때는 큰 문제가 없을 수도 있겠지만 확실하지 않은 곳에 모험을 걸 수는 없죠. 고민 끝에 찌는 작업을 마무리하고 정리를 한 뒤 프라이팬을 꺼내 들었습니다.
여러분!! 데쳐서 나온 이 물, 다 몸에 안 좋은 물인 거 아시죠?!
불에 구워 먹으면 맛있는 걸 누가 모릅니까.. 아침에는 바빠서 못하는 거죠. 그런데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촉박함에도 오랜만에 오늘은 데치고 불에 굽기까지 합니다. 배가 하나도 고프진 않지만 데친 상태의 훈제오리와 구워져서 노릇노릇해진 것과 비교를 해보니 구운 것이 확실히 식욕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기는 하네요.
역시 고기는 9292가 최고!!
프라이팬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아이들이 가까이 와서 보더니 "와! 냄새 좋다"라고 말을 하네요. 결국 노릇노릇 구워서 주니까 쪄서 줄 때보다 엄청나게 잘 먹기는 합니다.
2,500원짜리 부추가 비싸다고 1,000원짜리를 산 건 돈이 아까워서라기 보다는 어차피 못 쓴 부추는 버릴 것 같아서였습니다. 아침부터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힘들긴 했습니다만어차피 다 버릴 것 같았던 부추를 극진한 심폐소생술로 살려낸 노고를 저 혼자만이라도 좀 치하해주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