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에 제 필사인생에 크나큰 이정표를 하나 세웠습니다. 호메로스의 장편 서사시인 <일리아스>의 필사를 모두 마친 것이죠.
역사적인 이 책의 필사의 시작은 2021년 6월 6일부터였습니다. 그때부터 2023년 5월 말까지 거의 2년이나 걸린 셈이죠. 물론 처음에 이 책을 호기롭게 필사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때는 나름대로 잘 해낼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일단 <소크라테스의 변명>이나 <유배지에서 온 편지>, <논어> 같은 작품을 필사하면서 나름대로 필사에 대한 이해와 습관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거기에다 제가 그리스신화를 아주 좋아했기에 <일리아스>는 그런 점에서 좀 더 깊이 이해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저는 제 선택에 대해 뼈저리게 후회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분량이 많아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죠. 본문만 해도 660페이지가 넘는 책이고 필사노트만 총 13권을 사용했으니 어느 정도였을지 짐작이 가실 겁니다.
총 13권에 이르는 필사노트
이 책은 흉기로도 사용 가능한 매우 유용한 책이다
그러다 보니 어떤 날은 집중해서 쓰다가도 또 어느 날은 나사가 반쯤 풀린 상태에서 적은 적도 있어서 머리에 내용이 남지 않은 날도 꽤 많았죠.
그래도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는 희한하게도 제가 책 읽는 것처럼 이런 쪽에서는 중도포기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내려놓으면 편한데 말이죠. 결국 이런 요상한 고집 덕분에 2년은 넘기지 않고 <일리아스>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필사를 마치고 나니 정말 만감이 교차합니다.
2년이면 요즘 현역 육군 복무기간보다 긴 시간인데 필사지옥에서 이제 풀려나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2년 간의 시간이 제게 어떤 도움이 되었는지는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성장한 만큼을 계산하거나 측정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끈기, 집중력, 문해력을 비롯해 많은 부분들을 분명히 키워주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사를 통해서 글 쓰는 능력을 높이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을 직접 함께 쓰면서 한 문장, 한 문장씩을 곱씹어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으니까요.
아이들에게도 일리아스를 필사하느라 쌓인 공책을 보여주니 감탄을 합니다. 아이들에게 뭔가 해냈다는 걸 보여주는 효과가 제가 성장한 것 못지않게 가장 가치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2년 동안 썼던 공책을 휘리릭하고 들춰보니 그동안 제 삶의 변천사도 보이는 듯합니다.
지금은 필사를 좀 쉬고 있습니다. <타이탄의 도구>들을 초서하고 있는 중이라 필사를 할 책을 정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도전한다면 분량이 적당한 인문고전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일리아스>를 끝냈으니 <오디세이아>를 이어서 필사하면 좋겠지만 저도 살아야 하니까요. 그건 당분간 사양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