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직장동료의 갑작스러운 모친상에 조문을 하러 장례식장에 다녀왔습니다. 원래 노령이셨지만 마음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가족들에게는 큰 슬픔이 엿보였습니다.
그동안 많은 장례식장을 다녀봤지만 항상 이곳은 무겁게 와서 무겁게 나간다는 느낌이 많이 듭니다. 장례식장에서 함께 조문할 동료를 기다리는 동안 사무실에 있는 수의를 보게 되었습니다.
가격을 보고 적잖이 놀랐죠.
가격이 천차만별이었습니다.
아마 이런 물품에 아무런 고민이나 걱정 없이 선택할 수 있는 경우도 있겠지만 아닌 경우가 훨씬 많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언젠가는 찾아올 나의 마지막에는 과연 무엇을 남겨야 할까 하고 말이죠. 일단 만약에 그런 기회가 있다면 수의에 대해서도 써놓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이야기하게 된 이유는 예전의 경험 때문입니다. 제 지인 중 한 사람이 유서로 '내 장례식에 절대 돈 쓰지 마라'라고 썼다더군요.
삶의 마지막은 언제나 외롭고 슬프지만 또 한편으로 다른 해석도 있습니다. 한 철학자는 인간은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존재며 결국 모든 인간의 최후의 목표는 생을 잘 마감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죠.
철학에는 어차피 옳고 그름이 없지만 일견 일리가 있다는 생각도 듭니다. 삶을 잘 마무리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부분에 한해서는 말이죠.
예전에 상담심리학을 공부할 때 위기관리상담이라는 과목을 수강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중간고사 대신 리포트로 대체되었는데 주제가 놀라웠습니다. 바로 자신의 유서였기 때문이죠.
그때 성적은 엄청 잘 받았습니다. 제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는 글이 아닌 경제적인 부분과 앞으로 아이들을 어떻게 키웠으면 좋겠다는 진짜 실질적인 부분에 대한 글 위주로 작성한 것이 주효했던 모양입니다.
리포트로 유서를 쓸 때는 깊게 생각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하나 정도는 유서를 써두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예전에 오은영박사의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도 이른 시기에 엄마를 잃고 아빠가 혼자서 미성년인 4남매를 키우는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이별은 언제나 남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만 마냥 슬퍼할 수는 없기에 이겨내는 노력도 필요하겠죠.
드라마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대기업 회장들이 유서를 수정하겠다며 "김 변호사 불러!!"라고 말하는 장면들은 생각보다 시시껄렁한 장면이 아니었던 셈이죠. 적어도 그 유서가 있다면 회장의 남은 가족들이 얼굴을 붉히며 싸우는 일들은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유서를 써보니 제 삶에 대해서 되돌아보고 생각을 정리하는 데도 많은 도움이 되기는 했습니다. 바쁜 현대 사회에서 앞만 보고 힘들게 달려오다가 적어도 걸어왔던 길을 살펴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기니까요.
아이들도 얼마 전 학교에서 내 생애 마지막 편지라는 제목으로 대상을 자유롭게 정해서 글을 써보라는 숙제를 받은 적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은 남은 가족 세 명에서 편지를 썼는데 2호는 1호가 쓴 마지막 편지를 쓰고 울었다고 하더라고요.
저도 읽으면서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쓰는 아이는 아마 더 마음이 울컥하지 않았겠나 싶습니다.잘 썼다는 말로 화답해 주었고 일체의 글에 대한 평가는 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유행했던 임종체험을 해보면 관속에도 들어가 보고 유서를 써보며 자신의 삶을 천천히 돌아보는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그 시간이 되면 대성통곡을 하는 분부터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분까지 다양하다고 하죠. 대부분 지난 삶을 반추하며 후회와 반성을 뼈저리게 느끼기 때문이겠죠.
그런 시간을 통해서도 인간은 성장할 수도 있을 겁니다. 스스로 깨달음을 얻는 시간일 테니까요.
미래지향적이고 긍정적이며 희망을 주는 글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주제에 대한 글도 고민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