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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슈페너 Feb 19. 2024

작은 기적

모든 병이 그렇듯 한 번 아픈 곳은 웬만해선 완치되었다는 표현을 쓰기 힘들다.

오래전 발목 인대가 늘어나 한 달간 깁스를 했었다. 깁스를 푼 후에도 힘을 쓰지 못하여 몇 달간 조심해야 했고, 그 후로도 6개월간 구두나 샌들은 신지 못하고 운동화만 신고 다녔다. 지금도 무리를 하면 가장 먼저 욱신거리는 곳이 다쳤던 발목이다.

그리고 갑상선 암을 수술한 지 20년이 되었지만, 수술을 한 날 이후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하는 루틴이 갑상선 호르몬제를 먹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6개월에 한 번 피검사와 1년에 한 번 갑상선 초음파 검사를 하며 평생 관리하고 약을 먹어야 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 진단을 받고 나는 의사를 만날 때마다 질문을 하였다.

언제 끝이 나나요? 언제 약을 먹지 않아도 될까요? 언제 완치가 되나요?

의사는 시간이 흐르고 약을 잘 챙겨 먹으면 좋아지는 날이 올 거라며 똑같은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10여 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매일 똑같은 강도로 아프고, 힘이 든 것은 아니었다.

약을 거의 먹지 않고 지낸 시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전의 나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물론 이것은 개인적인 사례이고 완치가 되어 영원히 병과 이별을 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갑상선을 앓았던 사람이 우울증을 유발한다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갑상선은 감정을 다스리는 기관이기 때문이다.


어찌 되었던 나의 경험으로는 가장 컨디션이 좋고, 약을 거의 먹지 않았던 시기는 내가 좋아하는 그 무언가에 집중을 할 때였다.

나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은 웬만해서는 바뀌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 싫어하는 사람, 힘든 일, 숙명처럼 견뎌야 하는 상황들...

환경은 바뀌지 않아도 나는 바뀔 수 있다.

그것이 나에게는 좋아하는 일, 그것이 무엇이든 그곳에 풍덩 빠지는 것이었다.


딸의 남자친구가 보내준 사진을 받은 이후, 우리 가족은 꼬똥 드 툴레아라는 견종에 빠져 버렸고, 개를 싫어하던 나는 개를 데려오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생각만으로도 얼굴에 미소가 번지고, 이래도 되는가 싶을 정도로 행복했다.

조용히 작은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천에 있는 켄넬에서 브리더님과 상담을 하고 두 달 뒤 아기 꼬똥을 데려 오기로 했다.

규칙상 생후 두 달이 되기 전에는 분양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엄마와 동배들과 충분한 시간을 갖고, 예방주사도 2차까지 맞은 후에 데려올 수 있었다.

그 시간은 두 달이 아니라 2년 아니 20년처럼 느껴졌다. 가끔 브리더님이 보내주시는 사진을 받아 보며 20년 같은 시간을 견뎠다.


그리고 무엇을 해야 할까?

아기가 생기게 되면 방하나는 아기용품으로 가득 차게 된다.

아기 강아지를 데려오는 것도 비슷했다. 경험이 없는 나는 여기저기 정보를 주워 모아 필요한 것들을 사모았다. 여태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상에 눈을 뜬 것이다.

강아지용 샴푸, 컨디셔너, 빗, 옷, 목줄, 리드줄, 가방, 침구, 치약, 칫솔, 장난감 등등.

아!

이렇게 예쁜 것들이 있었어?

아니 여기는 별천지잖아!

강아지 천국이야!

여기저기 강아지 매장을 둘러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가 집안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우울의 그림자와 싸우고 있을 때, 세상 한쪽 다른 곳에서는 내가 알지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다.

갑자기 억울한 생각이 들었다!

나만 모르고 지들끼리만 신나 있었군!

왜 나는 몰랐지?

지들끼리만 축제를 벌이고 있었구나!

지들끼리만 사랑을 속닥이고 있었구나!

이런저런 물건들을 하나 둘 집에 쌓아 놓고, 그 앙증맞은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절로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첫아이를 갖고 배냇저고리, 양말, 모자, 신발 등을 사놓고 가슴 두근거리던 때와 비슷한 감정이 들었다.



그리고 또 무엇을 해야 할까?

이름을 지어야 했다. 가족들 저마다 의견이 분분했으므로 노트에 이름을 빼곡히 적고, 투표에 부치기로 했다.

구름이, 만두, 우주, 우유, 뭉게, 두부..... 끝없는 이름잔치가 열렸다. 하지만 어디선가 누군가는 이미 쓰고 있는 이름들이었다.

'백자!'

큰딸이 소리쳤다!

하얗고, 고고하잖아?

백자! 백자가 좋겠어!

백자? 영자, 길자, 미자... 이렇게 알면 어떻게? 더군다나 수컷인데!


결국, 고심 끝에 (조선) 백자라 이름을 정하였다.

고고하고, 우아하고, 하얗고, 고급지게! 항아리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백자!

멋진 이름이다.

이 세상에 백자란 이름을 가진 개는 너 하나뿐일 거다.




개이름을 짓는 것이 이렇게 신나는 일이던가.

최소한 이런 시간들 속에 우울은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공황도 감히 명함을 내밀지 못하고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구경만 하고 있었다.



처음 만난 날
한 달 된 아기꼬똥
눈빛에 반했다


처음 만난 날, 백자는 간절한 눈빛을 쏘아대며 '저를 데려가세요!'라 말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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