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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슈페너 Jan 25. 2020

남산의 부장들

앞으로도 나올 수 있는 이야기

중학교 3학년 가을, 대통령 서거 소식을 전하며 애국가와 함께 1분간 묵념을 하라는 교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담임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모두가 일어서서 고개를 숙인 채 돌아가신 분의 넋을 기렸다.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대통령을 하신 분이니, 옛날부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분으로 나에게는 단 하나뿐인 대통령이었다. 그런 분이 돌아가셨다고 하니 놀란 마음에 진심을 다해 기도를 드렸다.

뉴스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어깨너머 들으며 대략의 내용을 알게 되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그저 어른들의 일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반공교육'을 받으며 자란 우리 세대는, 북한은 괴뢰군으로 머리에 뿔을 달고 눈이 빨간 모습을 한 괴물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교과서에는 그러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간첩이 나왔다는 이야기로 가끔씩 겁을 먹기도 했었다.

국민교육헌장과 애국가를 4절까지 외우는 시험을 보고, 반공 포스터나 표어 짓기 대회도 해마다 열렸다. 이데올로기의 정점에서 저마다의 교육 현장은 어린아이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었다.


'남산의 부장들'은 어린 시절 바람결에 들었던 이야기를 커다란 화면에 가득 채워 보여 주었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은 독재자와 그를 사이에 둔 권력자들의 암투와 그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의 심리이다.

뜻을 같이 하여 '혁명'을 일으키고, 권력을 잡은 그들은 깊은 동지애로 큰 일을 같이 해낸 전우였다.

18년이란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의 마음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나라를 만들어 간다. 그 간극은 시간이 흐를수록 벌어지고, 소신이나 개념은 쓸데없는 것들이 되어간다. 깊은 사고를 원하지 않는 독재자는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사람을 곁에 두고, 눈도 귀도 마음도 함께 멀어 간다. 차즘 소멸의 길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생각하는 자와 생각하지 않는 자는 계속 대립하게 되고, 상생하는 법을 잃어간다. 결국 독재자의 마음을 놓치지 않기 위해 경쟁하게 되고 이미 그곳에는 양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게 무계획이었을까.

영화 속 이야기대로 라면, 독재자를 암살한 권력자는 살고자 하는 생각이 없었거나 매우 충동적이며 감정적인 사람이다. 자신의 소신대로 일을 치렀다고 보기에는 너무 허술하기 짝이 없기 때문이다.

영화 한 편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고, 그때의 상황을 보다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어 놓치고 있는 부분도 있겠지만, 개운치 못한 부분이 많다. 어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 너머의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체류탄 가스로 가득 찼던 대학시절을 생각나게 했다.

신입생 티를 벗지 못한 나는 한 껏 멋을 내고 첫 대학 축제를 즐기기 위해 학교로 향했다. 대학 정문은 휴교령이 내려진 공고문과 함께 굳게 잠겨 있었고, 멍하니 바라만 보다 집으로 돌아와야 했다. 그 후로도 학교를 다니는 내내 여기저기에 터지는 체류탄 가스로 눈물, 콧물을 쏟아 내며 지하 카페로 화장실로 뛰어들어야 했다.

정문 입구 학교 게시판에는 참혹한 사진들이 붙어 있고, 여기저기 흩뿌려진 유인물에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대학가가 몰려있는 우리 학교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고, 전경들의 호위를 받으며 학교에 다녔다.


독재자를 죽인 권력자가 원하던 세상은 아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죽음만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고, 그 후로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을까.

고작 그가 한 일이라고는 또 다른 독재자에게 권력을 넘겨주는 일이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그는 한 동안 미국에 살아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진실은 아무도 모른다.

그들만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은 자꾸만 옛날의 일들을 들추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제는 세상이 좋아져 얼마 안 된 이야기들도 줄줄이 나온다. 지금의 시절도 얼마 지나지 않아, 굳이 땅을 파헤치지 않아도 여기저기 널브러진 그 옛날의 유인물처럼 흩뿌려질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에 대해 이야기한다.


국가에 의해 합법화된 범죄의 시대에는 '국가적 행위'라는 낡아 빠진 사상 속에 의무를 준수하고, 명령을 지키고, 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판단의 기능을 상실하게 되며 이는 무의식적 왜곡을 불러일으킨다. 나아가 두려운 교훈, 즉 사고를 허용하지 않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권력이나 돈 등 인간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 자행되는 범죄가 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고하지 않음으로 인한 양심의 휴식 상태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과거에 그랬듯이 현재에도 다가올 미래에도 기형적 인간을 계속하여 만들어 낼 것이다. 그들은 조직과 권력을 손에 쥐고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고 통제하려 한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좋은 사회'에 대한 올바른 기준의 깨어있음 즉, 사고하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질투와 시기, 이기심과 자기애, 위선과 위악으로 연약한 감정을 가진 인간이 남에게 자신을 통째로 내어주지 않는 유일한 길은 '사고'하는 태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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