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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인슈페너 Feb 03. 2021

나이에 대한 생각

연대기적 나이와 정서적 나이

런던에 도착하고 다음 날 아침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대부분 시차를 적응하고 며칠이 지나 시험을 봤다고 한다. 유학원 스케줄이 엉망이었다. 몽롱한 상태에서 듣기, 말하기, 독해, 문법, 단어시험을 3시간에 걸쳐 보았다. 공부를 더 많이 하고 왔어야 했다. 중학교 이후로 시작된 후회를 그 나이에도 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학교 게시판에는 이름과 반 그리고 교실 번호가 적혀 있었다.

기대와 두려움을 동시에 품고, 교실 문을 열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여학생이 앉아 있었다.

낯선 나라, 처음 해보는 어학연수. 얼마나 반갑던지 일단 옆자리를 사수해야 한다.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한국에서 오셨죠?"

“네, 그런데 제 옆에 앉으시면 안 돼요. 같은 나라 학생끼리 앉지 못하게 되어 있어요.”

참 바람직한 논리다!

그녀의 자리를 한 칸 띄어 앉았다. 너무 멀리 가기엔 겁이 났기 때문이다.

반의 인원은 12명 정도로 유럽권의 학생이 많았고, 10대에서 20대 가끔은 30대도 있었다.  한국 학생은 나와 여학생, 남학생 1명씩 총 3명이었다.


선생님을 제외하고, 나의 나이를 아는 학생은 없다. 나 역시 그들의 나이를 알지 못한다. 동양사람의 나이를 잘 파악하지 못하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인 여학생과 남학생은 시간이 지날수록 친해지게 되고, 외롭고 반가운 마음에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한다. 나이가 주는 무게감에서 벗어나 낯선 곳에서 낯선 나를 만들고 싶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그들은 나의 나이를 알게 되었고,  역시나 어쩔 줄 몰라하며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둘의 나이는 나의 두 딸의 나이와 비슷한 20대였고, 두 사람의 나이를 합친 것과 나의 나이는 비슷했다. 그들이 상상했던 것보다 나의 나이는 너무 많았던 것이다.

그 순간 우리 모두는 한국으로 소환되어 나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한없이 소심해졌다.  여기는 영국이니 수업시간에 하듯이 “Jung!”이라 부르라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그들은 혼란에 빠졌다.

어떠한 면에서 더욱 커다란 이질감을 느낄 수 있고, 나이를 떠나 진지한 런던 살이의 어린 학생들에게 나는 교실의 또 다른 이방인이 될 수 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어머님? 아주머니? 음… 그냥 여기는 런던이니까, “언니” “누나” 할래요.

아! 다행이다!

그렇게 자식뻘의 학생에게 언니, 누나가 되었다. 나중에 반의 학생 모두가 나의 나이를 알았지만 그들에게 나는 여전히 “Jung!”이었다.




나이에 대해 무관심한 편이다.

나이를 의식하지 않고 산다는 건, 조금 무책임해 보일 수 있지만 굳이 손가락으로 연대기적 나이(해마다 먹는 나이)를 세어가며 살지 않는다. 나이는 누군가를 규정짓는데 약간의 정보만을 제공해 줄 뿐이고, 어떠한 단서도 알려주지 않는다. 세상이 정해놓은 '그 나이의 사람'은 미리 답을 정해 놓고 구겨놓은 틀 안에서 그 나이를 살아가라 압박한다. 얼마나 다양하고 각각의 개성을 가진 하나하나의 소중한 '그 나이의 다른 사람'인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고 외치며 돌아보는 순간, "그대로 멈춰라!"라고 요구한다.


지나간 20대를 생각해 보면 꼭 좋지만은 않았다.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 났던 나는 막상 세상 문을 열고 나가려 하니 자꾸만 멈칫거리고, 뒤돌아 어린 나를 훔쳐보았다. 마음은 너무 시끄럽고, 세상과의 경계에 아스라이 서 있는 날이 많았다. 아름답지만 자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는 20대는 '지나간 나이'가 아름다웠다고 알려준다.

나의 20대가 그리울 때도 있지만, 그것은 나이가 아니라 그때 그 시간, 겹겹이 쌓여 있는 이야기들이 보고 싶은 거다.

내가 떠나온  흑백 화면의 진실과 적당히 조작된 기억은 가슴 한편을 말없이 꾹꾹 눌러 준다.

그때 여기에 네가 있었다고.


선명한 자국들이 남기 시작하고, 가장 치열한 어른이 되기 시작하는 30대.

그 나이는 쓰다만 일기 같은 삭제된 문장들이 노트를 채워 나간다. 체념과 소망 사이를 오가며, 39란 숫자에 엄살을 떨고 처연한 뒷모습을 보이며 마지못해 40대를 맞이한다.

생의 타성에 나를 가두고, 몸과 마음의 호소를 시작하는 40대.

이 나이들이 가장 애달프다.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그리고 출근길과 퇴근길, 혼자이거나 여럿이거나 거리에서 마주치는 그 나이들은 너덜너덜해진 사연을 가슴에 품고 그럼에도... 나아간다.

그리고

50대가 되면, 아무것도 상관없는 나이가 된다.


20대가 소중했던 것을 30대에 깨닫듯이 지금의 나이가 찬란한 것을 한참이 지나서야 알아버린다. 지금의 나이를 신뢰해야 다가올 나이를 가볍게 맞을 수 있다.

혹자는 '사춘기는 대학생 때 까지다'라고 말하고, 또 누군가는 '결혼을 하기 전 까지다'라고 말한다. 어쩜 사춘기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마음의 호소 일지 모른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다.

점점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 되어간다.

공부를 시작하는 것, 사랑을 시작하는 것, 결혼을 하는 것, 혼자인 것, 새로운 무엇인가를 시도하는 것.... 이 모든 것에 나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나이가 든다는 건 '식어 버린 라면 국물'같다고 말한 사람도 있다.

나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은 풍성한 해물과 콩나물로 '멋을 낸 라면'이다.








2014. London 반 친구들과 함께






photo by 원정      

원정아티스트


      예술을 통째로 사랑합니다. 글을 쓰는 호강을 누릴 수 있어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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