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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광우 Mar 11. 2023

아내가 육백만 원을 주었다.

 며칠 전부터 아내는 내게 이번에 만기가 돌아오는 예금을 나에게 주겠노라 선심공약을 펼쳤다. 무언가 특별한 내막이 있어보이진 않았다. 그건 삼십년 이상을 함께 살아온 사람으로서 쉬 내릴 수 있는 판단이었다. 아내는 그리 영악한 사람도 아니었을 뿐 아니라 품은 의중이 투명하리만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금액이 그다지 크지 않은 육백만 원이라는 점도 나의 추측에 힘을 실어주었다. 

 굳이 까닭을 추적하자면 뭐 힘든 일도 아니었다. 최근 들어 유럽여행을 두 차례나 다녀왔는데 그때마다 여행경비가 나의 비자금통장에서 고스란히 지출되었던 것이다. 또 은퇴를 하면서부터 난 1년 단위로 용돈을 지급받아왔는데 올해 분은 아직 받지도 않은 상태였다. 사람을 만나는 횟수가 줄면서 돈이 크게 아쉽지도 않았고 나의 재정상태가 아직은 상당한 흑자를 기록하다보니 그걸 달라는 말조차 꺼내지 않고 있었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같이 외출할 때면 밥값이나 커피 값을 지불하는 것도 주로 내 쪽이었다. 그럴 때면 아내는 으레 ‘무슨 돈이 있다며…….’ 라는 말로 애처로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주식시장이 시퍼렇게 얼어붙은 날 ‘이런 날 주식을 사야하는데’ 넋두리에는 돈을 조금 줄 테니 재미삼아 주식을 해보라 은근히 권하기까지 했다. 많은 돈을 투자하지는 말라는 꼬리표가 반드시 따라붙긴 했지만. 그 모든 정황을 고려할 때 아내의 의도는 분명 순수했다. 

 세상에 돈 싫다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난 아내의 선심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오늘 은행으로 가는 아내를 따라나선 것도 그 이유에서였다. 물론 굳이 동행하지 않아도 계좌번호만 알려주면 입출금이며 이체가 간단하게 해결되는 세상이긴 했다. 그러나 아내는 나의 동행을 내심 바라고 있었다. 돈을 육백만 원이나 거저 준다는데 커피도 한잔 안 살 거야? 농반진반의 질문이 그걸 대변하고 있었다. 돈을 받는 사람으로서 예의치레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돈의 용처는 아직 확정하지 않은 상태였다. 정말 이번 기회에 수업료를 내는 셈 치고 주식공부를 해볼까? 노트북이며 휴대폰도 완전 구닥다리인데 눈 딱 감고 그걸 구입해? 유튜브 영상을 좀 더 그럴싸하게 만들 수 있는 짐벌이며 소형카메라를 사는 건 어떨까? 많은 생각들이 오갔다. 하지만 소심한 성격은 과감한 결정을 내리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했다.  

 주식투자는 하루하루의 주가등락에 가슴 졸일 일이 걱정스러웠다. 노트북이며 휴대폰은 오래되긴 했지만 크게 불편한 점이 없어 산다면 괜한 낭비라는 느낌이 없지 않았다. 또 영상장비의 경우는 아직 시기상조였다. 장비에 관한 지식이 없어 어떤 것이 좋고 나에게 적합한지 알지 못했고 그걸 제대로 다룰만한 실력도 부족했다. 그런 상황에서 장비를 구입하는 건 무모한 행위였다. 

 은행으로 가는 동안 돈을 쓸 궁리는 계속 이어졌다. 심지어 당장 쓸 곳을 생각하지 못하면 마치 그 돈이 사라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쫓기기까지 했다. 생각지도 않은 돈이 생기면서 따라온 부작용이었다. 문득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의 근황을 알려주던 신문기사가 떠올랐다. 당첨이 되는 순간 행복의 무지개를 잡았다고 생각했지만 결말은 하나같이 불행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말았다는 소식이었다. 무분별한 투자를 하고, 지인들의 꾐에 빠지고, 방탕한 생활을 일삼은 탓이었다. 돈이 움직임을 멈추는 순간 손해를 본다는 생각에 무엇이든 빨리 시작하려는 조급함과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것이 그런 결과를 낳은 것이 틀림없었다. 마음이 급하면 판단이 흐려져 실수를 불러오는 법이고, 실수는 횟수가 거듭될수록 실패로 이어지기 마련이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어쩌면 나 역시 그들과 같은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생겨났다. 비록 큰돈이 아니어서 그것으로 인생이 좌지우지된다거나 나락으로 빠지는 일이야 없겠지만, 돈을 잘못 사용함으로써 후회를 하고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일이야 충분히 생기고도 남지 않겠는가.  

 은행창구를 벗어나 아내가 나에게 다가왔다. 여보, 송금했으니 통장 확인해봐. 핸드폰을 꺼내 은행앱을 열었다. 통장에는 오늘 날짜로 육백만원이라는 숫자가 입금이라는 글자와 함께 찍혀있었다. 눈먼 돈이 생긴 기분이 어때? 그냥 입 싹 닦을 건 아니지? 아내의 쾌활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지 그럼. 자, 육백만원짜리 점심을 살 테니 그냥 따라오기나 해. 은행을 벗어나며 난 열려있는 은행앱으로 이체를 시도했다. 받는 사람 난에는 핸드폰 속에 저장되어있던 아내의 계좌번호가 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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