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령 -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by 원광우

책을 다 읽고 난 후 잠시 멍해졌다. 내용을 정리해보려 애를 썼지만 전체적인 줄거리의 맥은 잡히지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혼란스러운 러시아의 시대상황이 흐릿하게 잡힐 뿐이었고 곳곳에 등장인물들의 시체가 즐비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전쟁이나 대규모의 사고가 발생한 것이 아니었음에도 소설의 마지막은 그렇게 죽음이 장식했다. 자연사 또한 거의 없었다. 자살을 하거나 피살이 되거나 병을 얻어 또 충격을 받아 죽어갔다. 죽음의 자리에는 늘 악령의 모습이 비쳤다. 악령이라는 제목에는 복수형 접미사가 없었지만 단수가 아닌 복수였다.

이 소설의 배경에는 혁명이 자리한다. 하지만 혁명의 정확한 목적과 지향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막연하게 현재의 러시아를 변화시키려는 움직임이란 의미만 표현될 뿐이다. 그 이유는 아마도 유형생활을 거치면서 보수주의자가 된 도스토옙스키의 성향과 맞물려있는 듯하다. 자신의 입지를 고려할 때 반정부적인 입장을 확실하게 드러내기에는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혁명의 주체세력은 표트르 베르호벤스키다. 그는 귀족계급인 니콜라이 스타브로긴을 얼굴로 내세우고 ‘우리 편’이라는 5인조 민중조직을 만들어 행동대로 조정하면서 국가조직을 손아귀에 넣으려는 계획을 세우고 실행한다. 그러나 모든 일들이 자신의 뜻대로 쉽사리 흘러가지 않는다. 무엇보다 스타브로긴의 냉랭함이 발목을 잡는다. 또 5인조라는 조직도 그저 시중에 떠도는 오합지졸에 불과하다. 이따금씩 나타나는 아버지 스테판 베르호벤스키도 걸림돌 역할을 한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표트르로서 안달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계속 발생하게 만든다.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성향을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표트르는 급진주의 개혁의 선봉에 선 행동하는 자로서 거침이 없고 과격하다. 목적을 위해서는 협잡과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조직원들은 이런 그를 신뢰하지 않는다. 불신은 리더십의 부재로 이어져 배신과 밀고를 끊임없이 걱정하게 만들고 그럴 기미가 보이면 또 그 조직원을 제거하려한다. 불신의 악순환이 되풀이되는 꼴이다. 스타브로긴을 끌어들인 데는 그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다. 반면 스타브로긴은 혁명을 지지하지만 허무주의에 빠져 굉장히 소극적인 자세를 취한다. 귀족계급의 전형을 보여주는 그는 방탕한 생활에 절어 사는 인물이다. 자신에게 쏠리는 관심 때문에 재미삼아 백치인 레뱌드키나와 결혼하는가 하면 리자베타와 다샤 등과도 염문을 뿌린다. 그를 통해 우리는 당대의 귀족계급 문제점들을 상세히 접할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스테판은 행동하지 않는 지식인의 표상이다. 입으로는 계속 변화와 개혁을 떠들어대지만 몸은 전혀 움직이질 않으며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해한다. 이런 사람들이 혁명을 원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 결말이 어찌 될지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다. 작가의 의도 또한 포착할 수가 있다. 혁명을 떠나 소위 사회를 이끌어간다는 지도층의 인물 됨됨이가 어떠한지를 독자들에게 알리고자 했을 게 분명하다.

혁명은 실패한다. 이 과정에서 악령의 흔적이 누구에게서 나타나는지가 하나둘씩 밝혀진다. 그걸 이야기하기에 앞서 미처 소개하지 못했던 인물 몇몇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다. 특징적인 인물 중에 샤토프라는 사람이 있다. 농노 출신으로 혁명가였지만 스타브로긴의 영향을 받아 슬라브주의자로 전향한 사람이다. 훗날 그의 아내가 스타브로긴의 아이를 임신해 돌아왔을 때 기뻐하는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스타브로긴을 추종했는가를 알 수 있다. 또 키릴로프라는 인물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자살을 통해 자신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신념을 지닌 자살 미화론자다. 이 두 사람의 공통점은 모두 표트르의 희생양이 된다는 점이다. 샤토프는 전향했다는 이유로 밀고할까봐 표트르의 사주에 의해 5인조에게 살해되고 키릴로프는 표트르와의 거래를 통해 샤토프와 페디카를 살해한 누명을 쓰고 자살한다. 우리가 표트르에게 악령의 올가미를 씌울 수 있는 근거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어쩌면 악령 중에서도 가장 사악한 악령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손에는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면서 정치적 야욕과 개인적 욕심을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는 점에서 그 악행은 더욱 무겁다. 스타브로긴은 방탕한 생활이 상상을 초월하는 인물이다. 도를 넘어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그저 냉소주의에 빠진 귀족으로만 알려졌지만 그의 만행은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자신의 고백으로 낱낱이 알려진다. 앞서 언급한 무분별한 애정탐닉과는 또 다른 문제다. 소녀를 겁탈하고 그녀가 자살하게끔 만들었는가 하면 귀부인과 하녀 두 사람과 동시에 통정하기도 하고 아가씨를 유혹해 불법인 이중 결혼을 꿈꾸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을 티혼 신부에게 털어놓으며 회개하는 모양새를 취하지만 진실한 참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악령이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당연히 샤토프를 죽이는데 관여한 비르긴스키, 리푸틴, 시갈료프, 럄신, 톨카첸코 등도 악령의 가면을 쓴 자들이다. 나중에 자신들의 범행을 자백하여 범행 일체가 밝혀지는데 도움을 준 것과는 상관없이. 퇴역대위 레뱌드킨과 유형수 페디카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스타브로긴과 표트르의 범행에 아주 깊숙이 관련된 인물들이다.

결국 표트르 베르호벤스키와 니콜라이 스타브로긴만 악령이 아니었다. 등장인물 거의 대부분이 악령이나 다름없었다. 19세기 후반의 러시아에는 이처럼 악령이 득시글거렸다. 도스토옙스키가 이 소설을 통해 하고자했던 말은 바로 그 말이었다.

여전히 머리가 복잡하다. 뭐 하나 깔끔하게 정리된 느낌이 들지 않는다. 악의 소굴에 있다가 간신히 빠져나온 기분이기도 하다. 악령으로 당분간 악몽에 시달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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