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나는 나를 한 뼘도 용납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사랑은 희생이 아니다

by 하나

마음이 지칠 때마다 몸이 먼저 반응한다. 생리를 하지 않는 것으로, 피부 상태가 나빠지는 것으로, 잠을 자지 못하는 것으로, 작은 일에도 쉽게 피로를 느끼는 것으로. 그럴 때마다 몸을 더 바삐 움직인다. 휴식이 필요하다는 걸 알면서 한 번 더 일어나는 걸로 위안 삼는다. 아무것도 하지 못했는데 이건 했네, 저건 했네, 하면서.

요즘은 ‘언제부턴가’라는 말이 자꾸만 입에 맴돈다. 도무지 손에 잡히는 것이 없어서 내게 있었던 것들을 생각해 보는데, 그게 언제부터 생겨난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다 꿈같다. 현실과 꿈 세계가 분간이 안 갈 때가 많다. 잠에서 깨면 이곳이 진짜라는 것에 안도해야 할지 실망해야 할지 모르겠다.

오늘은 언니 집에 있다가, 자취방에 들렀다가, 영의 집으로 왔다. 이동 시간만 4시간이 넘으니 몸은 아직 언니네 집에 있는데 영혼만 옮겨진 기분이었다. 내 모든 것이 이곳에 도착하려면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할 거라 생각했다. 여기에 오는 동안 뭐라도 생각하고 끄적이려고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 것도 지겨워져서 이어폰을 뺐다. 주변 사람을 의식하며 걷는 것도 포기했다. 다 귀찮고 성가셨다.

영의 동네에 도착해서는 영과 함께 마트에서 장을 봤다. 며칠 만에 만나는 거기도 했고 영에게 줄 선물까지 준비했던 터라 높은 텐션으로 영을 만나고 싶었다. 영에게 준 편지 내용처럼 다정하고 싶었다. 영이 하는 모든 말에 반응하고 싶었는데 눈치 없는 몸이 자꾸만 늘어졌다. 컨디션이 좋지 않으면 말이 투박하게 나가는 편이라 영을 살갑게 대하지도 못했다. 계속해서 영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으로 정신을 붙들었다. 그동안 영은 내게 늘 그랬던 것처럼 작은 것에도 웃고, 작은 것에도 좋아하고 있었다.

장을 보고 오는 길에 영의 몸에 힘이 풀려가는 걸 느꼈다. 집에 도착해 꾸역꾸역 책상에 앉아있는 영을 내 옆으로 불렀다. 영이 뭐라도 하려는 걸 알았지만, 나중으로 미루고 싶었다. 매 순간 시계를 확인하던 영이었는데, 오늘은 한 번만 그랬다. 침대에 누웠을 때 내가 먼저 시간을 봤다. 5분 후에 일어나자고 하니 영이 가만히 있었다. 영이 곧 잠에 들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영은 언제나 너 곧 잘 걸? 하는 내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조금만 기다리면 항상 잠에 들었다.


한 번 잠에 들면 기절해 버리는 영이기에 소리를 죽여 움직일 필요도 없었다. 어김없이 잠에 든 영을 두고 세수를 하고, 집을 치우고, 글을 쓰기 위해 책상에 앉았다. 꽤 큰소리를 내도 세상모르게 자는 영을 보자 웃음이 났다. 음악을 틀고 글을 쓰던 중에 영이 뒤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영이 추운지 몸을 웅크렸다. 다가가 이불을 덮어주었다.


영이 나를 불렀다. 그 소리에 온몸이 끌어당겨졌다. 영의 옆에 가만히 앉았다. 영과 나는 오늘은 그냥 자라, 이제 일어나겠다, 하는 걸로 옥신각신했다. 그 다툼이 무색하게 영은 곧 다시 잠에 들었다. 영은 내 예상을 빗나가는 일이 없다. 생각하자 나를 꼭 붙들어 매고 있던 것들에 스르르 힘이 풀렸다. 예상할 수 없어 불안하고, 계속해서 달려가게만 했던 일들이 다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다.

누군가의 옆에 있는 일이 그저 내 희생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가족들을 대할 때도, 친구들을 대할 때도, 연인을 대할 때도. 요즘은 성격이 많이 좋아졌는지... 아니면 영에게만 그런 건지 누군가를 돌보는 일이 나를 돌보는 일처럼 느껴진다. 내가 하는 일은 아주 사소하고 작은 일들뿐인데, 그게 뭐라도 되는 것처럼 반응하는 영을 보면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어땠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언제부턴가 나는 나를 한 뼘도 용납하지 못했던 것 같다. 등 뒤로 영이 자는 숨결이 느껴졌다. 영의 옆으로 가서 눕고 싶었다. 한 뼘보다는 부족하겠지만, 자고 일어나면 조금은, 뭐라도 아주 조금은 열려있을 것만 같았다. 정신이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피곤해도 집을 치웠고, 글을 조금 썼고, 영을 재웠다. 오늘은 그것으로 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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