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원 Feb 09. 2024

수월한 농담

엄마가 저물어간다

엄마, 죽는 게 쉽지 않제?


검사 결과에 별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병원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내가 던진 농담이 제대로 먹힌 듯했다. 옥은 익살스럽게 고개를 저으며 죽는 게 보통 일이 아니라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제 우리에게 죽음은 농담이 되었다. 상상만 해도 슬픔이 짙은 안개처럼 덮치던 옥의 죽음은 어느새 장르를 바꾸었다.


폐암 4기, 5년 생존율 8.9%.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숫자에 기대어 나는 빠르게 해외 생활을 정리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여기저기를 떠돌며 방황해서인지 한국으로 돌아오는 일이 큰 덩어리를 입에 오물거리듯 망설여졌는데, 옥의 폐암 소식을 듣고 나자 단번에 삼킬 수 있었다. 한국으로 돌아와 최대한 가까이서 옥과 함께하기로 결정한 지 벌써 2년이 넘게 흘렀다. 그사이 옥은 항암치료와 큰 수술을 치러냈고 합병증으로 인한 폐렴으로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어려운 고비를 무사히 넘겼다. 최근 1년은 위태로운 버팀에 대한 보답인 듯 놀라울 정도로 호전되었다. 덕분에 암의 진행 상황을 주기적인 검사로 살펴보면서 한동안 알약으로 먹는 표적항암제를 처방받아 비교적 수월한 투병을 이어왔다. 수월한 투병. 수월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맞는 걸까, 생각했다. 수월해진 옥의 일상을 다행으로 느껴도 되는 걸까, 고민했다. 옥의 변화를 마주하며―이제는 일상이 된―병과 함께 사는 삶을 비일상적으로 여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도 수월치 않았던 순간이 기억의 자리로 멀찍이 떨어지고 나니 사람 마음이 참 가소롭다. 요즘을 다행이라고 여기는 내가 모순적이었다. 옥이 힘들어하던 시절을 불행이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2개월 만에 다시 찾아간 병원에서 복부 림프절 전이가 발견되었다는 소견을 전했다. 주치의 조 선생님에 따르면 표적항암제가 더 이상 효과가 없고 다시 항암 약물치료가 필요했다. 담당간호사는 신속하게 치료 일정과 항암 교육, 뇌전이를 체크하기 위한 MRI 검사까지 예약했다. 2, 3개월에 한 번씩 약만 받아 가는 생활이 이제야 익숙해졌는데 당장 다음 주에 입원을 해야 한다. 불과 30분 전에 진료를 기다리며 대기실에서 여행 계획을 그리던 옥과 내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진료실을 나온 옥의 표정에서 미묘한 변화가 일렁였다. 옥을 바라보는 나는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던가. 폐암 4기의 예후를 감안했을 때 전이의 가능성은 예상치 못한 일도 아니었고, 우리는 주어진 시간에 대한 고마움과 남은 시간에 대한 미련 없음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었는데. 수월했던 우리의 시간이 갑자기 구체적인 남의 숫자가 되어 불편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몸과 마음 상태는 연속적이고 유기적인데, 진단 의학의 언어는 옥의 삶을 비상사태라고 선언한 듯했다.


옥은 당장 검사 결과를 비밀로 하고 싶다 했다. 늘 자신의 일로 주변을 신경 쓰이게 하는 걸 극도로 꺼려했기에 나는 옥의 요구가 낯설지 않았다. 폐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처음에 치료를 거부했던 옥이었다. 병과 죽음에 대해 초연한 듯한 태도는 가족들이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향한 보이지 않는 마음의 애씀이 옥에게는 투병만큼이나 고단했다는 걸 알고 있기에, 나는 옥의 편에서 그녀의 마음을 최대한 이해하고 싶었다. 살면서 주변을 위해 자신의 최선을 다했던 옥이었지만 어쩐지 곁을 모두 내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자신을 향한 애정에 대해서는 고마움보다는 어쩐지 미안함이 앞서는 사람. 자신이 살면서 쏟은 애정에 너무 많은 애씀이 녹아여서일까. 늘 그랬다. 맡은 역할에 최선을 다했기에 미련이 없을 배우처럼, 조명이 꺼지면 관객의 박수도 마다한 채 서둘러 무대 위를 떠날 것 같은 사람. 그런 옥이 이번 검사 결과를 두고 드물지만 분명한 요구를 하고 있었다. 이제껏 자신의 병 앞에서 자신보다 타인을 위한 선택을 했을지도 모를 마음이 엿보이는 것 같았다. 원치 않은데 시작된 기나긴 연극 같은 것이 삶이라면 죽음만이 무대에서 내려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오래도록 엄마가 저물어가는 것 같아 슬펐는데 이번에는 옥의 말을 듣고 있는 내 표정에서 어떠한 슬픔도 비치지 않았기를 바랐다. 옥의 죽음을 엄마의 죽음으로 받아들이는 아들의 슬픔이 내비치지 않기를. 옥 앞에서는 아들인 나를 죽이고, 죽음 덕분에 더욱 오롯해지는 옥의 삶을 응원할 수 있다면.




병원에서 돌아오자마자 옥이 집 앞 마트에서 자몽을 한가득 사 왔다. 이번 항암약은 치료 중에 자몽을 먹어도 된다며 아주 신이 났다. 주치의 선생님이 다른 환자가 많아 피곤할 거라며 진료시간에 본인 질문은 잘하지도 않던 옥이, 이번에는 굳이 지나가는 간호사를 붙잡고 물어봤단다. 식탁에 앉자마자 자몽 하나를 후다닥 까더니 한입 베어 물고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도무지 따라 웃지 않을 수 없는 표정에 나도 자몽 하나를 입에 물었다.


어쩔 도리 없이 바탕색이 슬픔일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적극적으로 슬픔의 바탕색을 끌어안고 자기가 선택한 색을 덧칠해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 사랑이라면, 옥은 비로소 삶을 적극적으로 살아내고, 사랑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엄마가 아닌 옥으로 그녀를 더 깊이 알아갈수록, 죽음을 품은 옥이 다채롭다. 죽음을 끌어안은 누구의 삶이 이토록 다채로운 것이라면, 죽음은 과연 사라지는 일일까. 사라지는, 사라진 것들은 모두 슬픈 일일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