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저물어간다
어른들은 옥의 일터를 양장점 또는 의상실이라고 불렀다. 의상 디자이너였던 옥은―패션 디자이너라는 표현이 없던 시절―1970, 80년대 부산 최대 번화가였던 광복동 일대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기성복이 흔치 않던 당시에는 옷을 맞춰 입는 일이 일반적이었고 동네에서 제일 잘 나가는 의상실은 소위 '부잣집 엄마들'이 여유를 누리고 부리는 사교 공간이기도 했다. 사회 초년생부터 남다른 감각을 인정받았던 옥은 유독 단골손님이 많았고, 결혼 후에 같은 업계 ‘참한’ 언니의 스카우트를 받아 좋은 조건으로 이직도 해냈다. 이곳이 내가 기억하는 옥의 첫 일터였고 이름은 ‘참한 의상실’이었다.
나는 유치원이 끝나면 집이 아닌 ‘참한 의상실’로 향했다. 옥의 일터는 부산에서 오래된 전통 시장인 동래시장 가운데 위치했다. 옥이 바쁠 때는 혼자 하원하는 일도 익숙하게 해냈는데,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수많은 유동인구가 오고 가는 시장을 가로지르는 건 무서움보다는 즐거움이었다. ‘참한집 꼬맹이’는 인사성이 밝아 시장 어르신들의 귀여움을 여기저기서 받다 보면 의상실로 가는 길은 전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거리였다. 의상실에 도착하면 꼬맹이 키를 훨씬 넘는 마네킹이 쇼윈도를 장식하는 입구를 지나 들어간다. 내부 한쪽 벽에는 형형색색의 다채로운 원단이 잘 정리되어 있었고, 다른 한편은 알록달록한 캔디 같은 단추와 액세서리가 종류별로 반짝였다. 가게 가운데는 부잣집 거실에서 옮겨온 듯 한 화려한 패턴의 소파 한쌍이 마주 보고 있었는데, 중간 테이블 위로는 손님들의 찻잔과 주전부리, 원단 샘플이 널브러져 있었다. 한창 일하던 중에도 옥은 나를 누구보다 기쁘게 반겨주었고, ‘참한’ 이모와 재단사 삼촌, 몇몇 낯익은 손님들까지 혼자 하원한 내가 대견한지 저마다 한 마디씩 건네곤 했다.
옥은 나에게 가장 가까운 어른이자 나의 유일한 세상이었다. 배를 타셨던 아버지는 보통 6개월에서 1년씩 해외 생활을 하셨는데 내가 태어날 때도 태평양 어딘가를 지나고 있었다고 한다. 옥 역시 맞벌이로 바빠 혼자 놀았던 시간이 대부분이지만, 옥과 함께한 기억에서 의상실을 결코 빼놓을 수가 없다. 의상실은 어린 나에게 펼쳐진 가장 해상도 높은 세상이었다. 단연코 그 세상의 주인공은 엄마인 옥이었다. 옆에 꼭 붙어 앉아 놀 때면 표정 없는 마네킹도 신비롭게 느껴졌고, 무시무시한 크기의 원단 가위는 마법을 부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평소에 검소하고 수수한 옥은 의상실에서만큼은 다른 사람이었다. 손님들에게 좋은 예를 보여주기 위함이라 했지만 옥의 취향은 어떠한 설명 없이도 향기처럼 풍기는 무엇이었다. 차분한 톤의 투피스에 감각적인 포인트가 되는 꽃 코사지를 가슴 한쪽에 달고, 은은하게 돋보이는 보라색 펄 아이 쉐도우는 손톱 끝만 살짝 칠한 빨간 매니큐어와 조화를 이루었다. 양 귓불에 반짝이는 클립온 진주 귀걸이와 귀 뒤로 넘긴 머리칼은 짧지만 우아했다. 과하지 않지만 화려하고, 애쓰지 않지만 세련된 착장. 그리고 그에 절묘하게 어울려 떨어지는 화장까지. 옥은 내가 처음으로 경험한 팔레트였을지도 모르겠다. 손님들과 한참을 떠들다가도 어느새 빈 종이에 의상 디자인을 슥슥- 스케치하곤 했는데, 나는 이때의 옥을 어떤 생기(生氣)로 기억한다.
얼마 전 옥과 식사를 하기 위해 낙지볶음집을 찾았다. 동래시장 입구에 위치한 그 집은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였다. 옥이 의상실 일할 때부터 다녔던 곳이니 못해도 30년이 넘은 단골집이었다. 늘 시키던 대로 낙지와 새우가 섞인 전골 2인분과 우동 사리를 주문했다. 반찬으로 나오는 취나물과 오징어 젓갈도 기가 막힌 곳이라 공깃밥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맛이 여전한 게 신기하고 괜히 고맙다는 생각까지 하면서 부를 만큼 부른 배를 두드리며 가게를 나섰다. 소화도 시킬 겸 오랜만에 시장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폐암 수술 이후로 숨이 쉽게 차는 옥의 속도에 맞추어 천천히 거닐었다. 천오백 원이었던 시장 칼국수는 세월을 타고 오천 원으로 올라 있었다. 전통 시장의 부흥을 위해 ‘250년 역사’, ‘최초의 부산 전통시장’이라는 광고 현수막이 여기저기 붙어 있었지만 사람이 예전만큼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기억보다 한산해진 시장 골목 사이를 따라 들어가다 보니 예전 의상실이 있던 위치까지 닿았다. 골목 입구는 그대로 좁았지만 주위 건물은 높아져 있었다. 마네킹이 있던 자리에는 식품용 냉장고가 차지했고, ‘참한 의상실’은 반찬 가게로 바뀌었다.
아들내미가 엄마랑 그렇게나 사진을 찍고 싶은가 보네.
돌아오는 길 버스정류장이었다. 사진 찍는 걸 안 좋아하는 옥을 붙잡고 어떻게든 한 장 건져보겠다며 오만 애교와 각도로 애쓰는 모습을 보더니 지나가던 아주머니가 툭 던지듯 말씀하셨다. 어릴 때였으면 괜히 부끄러워 그만할 법도 한데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진을 열 장 넘게 찍었다. 성인이 되고 집을 떠나 오랫동안 해외에서 지냈다 보니 일상에서 함께하는 순간이 소중해졌다. 품에 안겨 사진을 백 개라도 더 찍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어쩐지 사진만 찍으면 어색하게 얼어버리는 옥의 미소가 못내 아쉬웠다. 찍은 사진을 아무리 고르고 골라봐도 내가 가장 선명하게 기억하는 옥의 생기를 담아내기에는 찰나가 비좁게 느껴졌다. 수없는 찰나가 겹치고 또 겹쳐져 어느새 긴 세월로 흘러 지나가고, '참한집 꼬맹이'는 서른을 훌쩍 넘겼다. 언제부턴가 엄마가 저물어간다는 마음이 자주 나를 찾아온다. 받아온 사랑과 날 향한 최선이 새삼스레 콧등을 시큰하게 하던 많은 장면과 함께. 가능하면 이번 옥의 생일에는 청춘을 선물하고 싶은데 어디서 살 수 있을지 알 길이 없다. 옥의 핸드폰에 나는 ‘최고 작품’으로 저장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