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원 Feb 15. 2024

슬프도록 서늘한

엄마가 저물어간다

    수술이 끝나고 떠올린 단어는 지옥이었다. 힘들다, 아프다는 표현을 옥에게서 평생 들어본 적이 없는데 중간단계 다 건너뛰고 지옥이라니. 본인도 어색하게 느껴서였을까. 지옥. 지옥이라는 단어 주위에 어떤 망설임이 맴도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다른 마땅한 단어가 없다는 듯 지옥이라는 말은 몇 번이고 내뱉어졌다. 통화 너머 지친 옥의 목소리에서 익숙한 서늘함이 바다를 건너왔다. 마음이 급해졌다. 보스턴 공항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대기시간이 하염없이 늘어졌다. 아, 맞다. 한국에 도착해서도 격리를 해야 하는구나. 면역력이 바닥을 쳤을 텐데. 엄마를 최대한 안전하게 만나려면 서두르면 안 돼. 서두를 수도 없네. 일단 마음을 단단히 챙기자. 


    코 쑤심 없이는 어디도 갈 수 없는 시국에 다시 나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만든 건 옥의 폐암 소식이었다. 그렇지. 코로나로 온 세상이 야단법석이어도 폐암이랑 비할 바는 아니지. 조직검사 결과 폐암 4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옥은, 이모들과 아버지에게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고 나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아버지는 한국과 미국 시차가 애매한 틈에 몰래 전화를 걸어 옥의 소식을 어렵게 전했다. 병을 숨기려고 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았다. 나는 옥에게 전화로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 우리 서로 편하게 아프자. 




    익숙해졌다 싶었던 우울증은 보스턴에서 더 심해졌다. 몸에 더 잘 맞는 약을 찾기 위해 매주 정신과를 찾았다. 먹여 살릴 식구도 없는 내가, 내 몸 하나와 마음 돌보는 일이 아슬아슬한 나날이었다. 보폭보다 널찍이 떨어진 징검다리를 건너는 듯 위태로웠다. 최선을 다해 발을 굴려보지만 다음 디딤돌에 닿지 못한다 해도, 발을 헛디뎌 급물살에 휩쓸린다 해도, 그건 그대로 괜찮을 것 같았다. 죽고 싶은 마음만큼 이렇게 살기 싫다는 감각도 분명했다. 상담 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매주 한 번씩은 꼬박꼬박. 마음이 부칠 때는 두 번씩. 나는 병세를 숨기고 싶었지만 일상을 모조리 덮은 우울은 숨을 자리를 허락지 않았다. 우울에 푹 절여진 위태로움은 짧은 통화에도 새어 나왔다. 숨길 힘도 없이 옥에게 하나 둘 털어놓기 시작했다. 살가운 통화를 자주 나누는 모자였지만, 분명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상담에서 나눈 이야기는 옥과의 통화로 이어졌다. 옥은 내가 통과하고 있는 마음을 깊이 공감했다. 내가 닮지 말아야 할 부분을 닮았다고 자책했다. 날 임신했을 때 사는 일이 막막해 한없이 우울했던 자신을 기억해 냈다. 서로를 닮은 마음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닳고 닳아 닮은 마음이 우리 대화 속에서 포개어질 때면, 별안간 살 힘이 생겼다. 낯선 경험이었지만 편안했고 고마웠다. 어느 날 나는 옥에게 죽고 싶었다고 고백했다. 엄마인 옥에게 아들인 내가 힘들다, 아프다를 건너뛰고 죽음을 함부로 입에 올리고 말았다. 죽을 만큼 어려운 일이었지만, 죽을 마음으로 내가 떠올린 수많은 일들 중에 가장 잘한 일이었다. 


    옥은 자신의 폐암 소식이 나에게 무거운 돌을 안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정작 내 마음을 오래 누르고 있던 돌은 따로 있었다. 와중에도 자신을 맨 뒤에 두는 일이 익숙한 사람. 그 마음의 서늘함. 나는 이런 엄마가 자주 슬펐던 아들이었다. 어쩌면 암세포보다 더 깊숙이 퍼져있을지도 모를 오래된 마음의 서늘함이 너무 익숙해서 아팠다. 그날 밤, 서늘함은 습함으로 다가와 나를 덮쳤고 축축해진 마음에서 새어 나온 물은 새벽녘에 눈으로까지 고여 나왔다. 




    친절한 주치의 조 선생님의 설득 덕분이었을까. 완치는 없고 근치를 목표로 할 수 있는 걸 조금씩 해보자는 말에 옥은 치료를 받기로 마음먹었다. 6차에 걸친 약물 치료를 버텨냈고 수술을 시도해도 좋을 만큼 호전을 보였다. 회복에 대한 희망을 느낀 걸까, 주변의 마음을 외면하기 어려웠던 걸까. 망설이던 옥은 수술을 결심해 주위를 기쁘게 했다. 10년 전 유방암 때보다 항암약이 훨씬 버틸만하다며 그사이 의학이 엄청 발전했다느니, 건강보험에서 다 내줘서 이 정도면 다 공짜라느니, 평생의 레퍼토리인 '엄만 괜찮으니까 우리 아들 너-무 신경 쓰지 마래이-'를 시전 하며 당당하게 입원했다.


    격리를 끝내자마자 부산 집으로 달려갔다. 익숙한 내 방과 집안 가구는 여전했지만 옥은 많이 달라져있었다. 지친 얼굴에서 지옥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을 시간이 감히 엿보였다. "다시는 입원하기 싫다."는 말을 반복했다. 모두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면역력이 바닥난 몸은 바이러스가 넘나들기는 쉬웠다. 수술 부위의 자연스러운 통증인 줄 알았던 증상은 알고 보니 대상포진이었고, 기침은 좋아질 기미가 없이 계속 심해지더니 야속하게 폐렴으로 이어졌다. 지옥을 넘어와 또 다른 지옥 앞에 선 옥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니 속이 타들어갔다. 타는 속에서 불안의 안개가 피어올랐지만 예상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일찍이 찾아본 덕에 나는 조금 덜 절망할 수 있었다.


    보스턴에서 옥의 소식을 전해 듣자마자 포털사이트를 검색했었다. 암 자체보다 합병증으로 사망할 확률이 높다는 전문의 소견이 많았다. '폐암보다 위험한 폐렴'과 같은 자극적인 의학 기사 헤드라인은 바로 머릿속에 저장되었다. 그리고 뇌리에 각인된 숫자. 8.9. 왜인지 숨을 참고 검색창에 타이핑했던 '폐암 4기 생존율'의 결과였고, 찾는 걸 요약해서 상단에 띄어주는 포털사이트의 친절함 덕에 두 번 클릭할 필요도 없이 화면에 떴다. 이를 악물고 떠나온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을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결정하게 도와준 숫자, 8.9. 과학과 통계를 기반으로 한 소수점 한자리 숫자 덕분에 '앞으로 옥과의 남은 시간은 최대 5년'이라는 묵직한 덩어리를 물 한 모금 없이 꿀꺽 삼켰다. 정신 차려보니 나는 바다를 건너와 부산 집에서 옥의 약봉지를 챙기고 있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