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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원 Mar 14. 2024

할머니께

엄마가 저물어간다

마침내 봄이 오나 봐요. 외출할 때 여전히 겉옷을 챙기지만 얼굴에 닿는 바람의 온도가 조금 달라졌네요. 할머니가 떠나신 후, 스무 해가 넘게 흘렀고 올해는 스물다섯 번째 봄이 됩니다. 꼬마였던 저는 그날을 슬픔으로 기억하기보다 유난히 따뜻했던 날로 기억합니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눈송이처럼 휘날리던 벚꽃이 어제처럼 생생해요.


돌아가시기 몇 해 전, 포경수술하고 절뚝거리며 집으로 들어오는 저를 보고 현관 앞에서 맨발로 마중 나와 손뼉을 치면서 박장대소하시던 할머니… 너무 크게 웃으셔서 그때 할머니 금니가 보였던 거 아세요? 와… 저는 진짜… 여덟 살 인생, 처음으로 느껴보는 고통이었어요. 절뚝거리는 절 보고 할머니는 요즘 표현으로 그야말로 빵- 터져서 아파트 복도가 떠나가라 웃으셨죠. 가끔 엄마랑 옛날 얘기하다가 그날을 떠올리면 우리 둘 다 실패 없이 웃음이 터집니다. 왠지 할머니의 ‘금니웃음’ 덕분에 조금 덜 아팠던 것 같기도 하네요. 그래서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면 봄날의 벚꽃처럼 환하고 또 환해요. 이렇게 좋은 계절에 떠나셔서 다정했던 할머니를 봄과, 그리고 꽃과 함께 떠올릴 수 있어서 참 좋아요. 떠나신 타이밍도 참 선물 같네요.


이번 할머니 기일에는, 엄마, 이모, 그리고 저, 셋이서 대만 여행을 갑니다. 할머니 두 딸과 손자인 제가 이렇게 여행을 떠나게 되다니. 쭉 지켜보셨겠지만 지난 3년은 엄마에게 참 많이 힘든 시간이었어요. 말 나온 김에 꼭 여쭤봐야겠어요. 왜 유독 넷째 딸인 우리 엄마만 암을 두 번이나 하는 걸까요. 혹시 아들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엄마가 뱃속에 있을 때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으셨던 걸까요. 하늘에서 하나님 마주치면 한번 물어나 봐주세요. 저 대신 따져주실 수 있으면 그것도 속 시원할 것 같아요. 비록 투병으로 쉽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최근에는 많이 호전되어서 여행 갈 마음이 생긴 엄마가 참 반가웠어요. 엄마가 적극적인 의지를 내비치자마자 마음 바뀌기 전에 저는 망설임 없이 비행기 티켓을 결제했습니다. 이번 여행은 엄마가 제-일 사랑하는 동생, 할머니 막내딸까지 함께 갈 수 있다고 하니 말 다했죠. 후다닥 질러버리고 나서야 이번 여행 일정이 할머니 기일과 겹친다는 걸 알아차렸네요.


그래서 이번에는 대만에서 할머니를 기억하는 시간을 가져볼까 해요. 한국에서 다른 이모들 만나고 꼭 대만도 들러주셔야 합니다. 엄마에게 할머니는 어떤 엄마였을까, 물어볼 참이에요. 저는 엄마가 아직 제 곁에 있는 데도 이상하게 그리워질 때가 있거든요. 엄마는 엄마의 엄마가 얼마나 보고 싶을까요? 할머니가 떠나신 지 20년이 넘게 흘렀으니까, 그 시간만큼 그리움도 줄어들었을까요? 음, 매년 흩날리는 벚꽃을 보다가 어느새 눈가가 촉촉해지는 엄마를 보면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아요.


아, 삼촌은 잘 계시나요? 할머니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던 아들이 그곳에서 잘 맞아주던가요? 아마도 누구보다 큰 포옹으로 할머니를 반겨주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늘 유쾌하고 코미디언 뺨치게 웃겼던 삼촌이니 할머니 옆에서 얼마나 재잘재잘 수다를 떨고 있을까요?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요. 이곳에서는 상상이지만 그곳에서는 현실이라 믿으며 이렇게 편지로나마 마음을 부쳐봅니다. 엄마에겐 하나밖에 없는 남동생이었고, 이모에게는 유일한 오빠였던 삼촌을 여기서도 많이 그리워합니다. 이번 할머니 기일에 삼촌도 함께하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시간되나 한번 여쭤봐 주세요.


여행하는 동안 할머니 넷째 딸, 막내딸, 그리고 손자까지- 안전하고 즐겁게 지낼 수 있도록 보살펴주세요. 여행 내내 함께해 주신다면 더욱 좋겠죠. 할머니가 곁에 계실 땐, 너무 꼬맹이여서 못했던 말인데 저도 이제 서른을 훌쩍 넘겨서 이 말의 온도를 알게 되었어요. 사랑해요. 그리고 보고 싶어요. 이제 곧 피고 또 지고 말 벚꽃만큼요. 우리 봄이 되면 만나요,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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